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서(직업) (문단 편집) == 영미권의 사서 == 한국의 [[사서교육원]] 과정[* 한국에서는 준사서와 정사서의 총 2년 과정을 거친다. 이는 [[문헌정보학과]] 출신에게는 차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과정을 수료한 사람들 대부분이 [[전문대학]] 학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며, 해당 기간 동안 전공 공부에만 전념한다.]은 영미권의 사서교육 과정을 참고하여 구축되었다. 그러나 큰 차이점은 한국에서는 자격증을 향한 과정인 반면, 영미권에서는 '''석사 과정'''을 중심으로 교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과 영미권에서 사서에게 중점을 둔 부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한국에서는 사서의 주 역할로 도서관 및 장서 자료의 '''관리'''가 강조된다. 다시 말해, 한국의 사서는 도서관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주로 수행한다. 반면에 영미권의 사서는 자신이 전공한 학사의 특정 학문 분야의 전문가, 즉 주제전문 사서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들은 해당 분야의 전문서, 논문, 저널 등의 내용을 분석하고 정리하여 요약 및 색인 작성을 통하여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전문 서적의 내용을 평가해 구매를 결정할 수도 있고, 첨단기술과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영미권의 사서는 전문성을 높이는 것에 중점을 두며, 따라서 그들의 사회적 대우와 봉급은 높은 편이다. 미국에서는 어떤 학술서의 서문에 "이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 목록에 사서의 이름이 포함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다. 평균 연봉은 약 $50,000~60,000[* 현재 환율로 약 6천~7천만원] 정도이며, 경험이 풍부한 고급 사서는 연봉 $100,000에 가깝게 벌기도 한다. 사서는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비율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직업군 중 하나이다. 세계 최초의 사서양성기관인 도서관학교를 설립한 미국의 [[멜빌 듀이]]는 빠르고 경제적으로 사서를 양성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당시의 교육 기회가 낮았으며, 임금이 낮았던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기관에 받아들이면서 시작되는 등 여성들을 주요 대상으로 했다. 이러한 영향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현재도 전 세계의 사서의 비율 중 여성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2008년]] [[7월]], 미국의 한 사서는 미국 의회 도서관[* 당시 미국 의회는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었다.]이 [[독도]]의 공식 지명을 국제 기준[* 일단 실효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서 쓰는 명칭을 우선하게 되어있다.]을 따르지 않고, [[2007년]] [[12월]][* 당시 한국 대통령은 노무현이었다.]부터 '리앙쿠르 암'으로 변경하려는 계획을 알아차렸다. 이를 알게 된 그녀는 이 변경을 막기 위해 노력했고,[* 그녀 덕에 미국에서 꽤 영향력이 있다는 한인사회가 움직였고, 이것이 결정적이었던 듯하다.] 그 결과 지명표기 변경을 철회하고, 한인사회의 큰 지지와 함께 미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에게도 이 문제가 알려졌다. [[조지 워커 부시|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하여, 대통령 명령으로 그 건을 1주일만에 없었던 것으로 만들면서 해당 지명 변경 계획을 취소시켰기 때문이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7/2008071700032.html|출처]] 대통령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미국 내에서 이례적이었고,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몇몇 의견들은 부시 대통령의 이러한 결정이 그의 방한 일정을 고려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여러모로 대단한 이 사건은 사서의 역할과 영향력에 대한 주목을 받게 했으며, 사서나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비판도 이어졌다. 세계 각국의 도서관에서 일하는 한국인 사서들은 한국에 대한 외국의 인식 개선과 오해 및 왜곡을 바로잡는 역할을 상당히 해왔다. 대표적으로, [[하버드대학]]의 옌칭도서관 부속으로 한국관이 설립되고, [[한국학]] 연구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재미한국 사서들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이었다. 또한 세계인쇄사에 큰 영향을 준 [[청주시|청주]]의 [[직지심체요절]]과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한 것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던 사서 [[박병선]]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중요한 업적들도 대중의 짧은 관심 속에 잊히기 쉽다. 이러한 업적들은 대개 얼마 못 가서 묻혔으므로 미국과의 외교마찰까지 갔음에도 이를 계기로 [[정부#s-1]]가 이러한 사서들의 노력을 꾸준히 인지하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러한 이슈를 외교적 차원에서도 활용하여 한국의 긍정적 이미지를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