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선대형 (문단 편집) == 실전 사례 == 상기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 왕 클레옴보로토스를 상대로 벌인 [[레욱트라 전투]]에서 처음 등장하여 그 효용성을 증명했다. 테베군 6천 명은 스파르타군 1만 명을 맞아 레욱트라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에파미논다스는 일반적인 병력 배치를 포기하고 종심 50열에 달하는 병력을 적 주력을 맞을 좌익에 배치, 중앙과 우익에는 적은 병력만을 배치했다. 그리고 적을 맞아 적과 서로 마주보며 이동할 때에 중앙과 우익은 의도적으로 좌익보다 행군 속도를 늦추었다. 사선대형은 그렇게 완성됐다. 이 전투로 클레옴보로토스는 [[치명상]]을 입고 얼마 가지 않아 사망하였으며 이 한 번의 전투로 중장보병대에서만 500명이 사망했다. 큰 희생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는 중장보병대에서만 나온 수치로, 스파르타 중장보병대의 25퍼센트에 달하는 수치였다.[* 스파르타 특유의 엄격한 신분제가 문제였다. 중장보병은 오로지 시민만이 될 수 있었는데, 그 시민이 되려면 부모 모두가 시민으로 인정받는 혈통이어야 했다. 어느 한 쪽이 외국인이나 노예라면 절대 시민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스파르타 말기까지 가면 시민의 숫자가 천 단위까지 떨어지게 되는데, 그래서 500명 사망한 것 만으로 스파르타 중장보병의 25%가 상실된 것이다.] 주력인 중장보병대에서 저만한 희생이 나온 뒤로 스파르타는 다시는 그리스의 패권을 노리지 못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자면, 사선대형이 전장의 '시간적 차원축' 을 이용해 아군의 전력을 집중시켰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승리의 보증이 되지 못한다. 우연이건 기지로건 적 전력이 구원하러 오지 못하는 사이 피해를 입히는 것 자체는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전술적 상황이기 때문에 이 때의 스파르타 역시 개념적으로 알고, 알아볼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도에 따른 전술을 실제 전투상황에서 '시간이 흐르는 도중에' 운용해낼 수 있었다는 데에 있다. 실제로, 사선대형의 배치 자체는 적의 시야에 파악되기 전까지만 무대응이 가능한 일종의 눈속임에 가까운 것이었고, 아무리 연막작전을 펼친다 해도 좌익을 극단적으로 강화하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스파르타군은 테베군의 의도를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단순히 어택땅 닥돌 AI만으로 싸우는 것이라면 시작 포진으로 결론이 정해져 있었겠지만 우익이 멀찌감치 물러서고 좌익만 바글바글한 것을 본 스파르타 왕 클레옴브로토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력인 우익을 선회시켜 보다 약한 좌측에서 포위를 하려고 시도했다. 여기에서 사선대형 전술을 실제로 실현시킨 것은 스파르타의 움직임을 제약시키고 자신들의 전술 밖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한 테베의 대응에 있었다. 테베군 좌익은 단순히 앞으로 가서 정직하게 맞서오는 적 우익과 싸우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충분히 훈련된 [[신성부대]] 의 기동능력을 바탕으로 스파르타의 우익이 자신들의 오른쪽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저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스파르타군은 더 이상 그리스 지역에서 혼자 독보적으로 우월한 조직력과 기동성을 갖춘 것이 아니었고, 신성대의 능력은 스파르타가 급히 전술적 변화를 시도하는 것을 충분히 방해하면서 자신들의 전술로 끌어들일 수 있을 정도로 상향되어 있었다. 결국 스파르타는 적의 의도를 파악한 뒤에도 전투 중에 그것을 저지할만한 역량과 전술을 보여주지 못했고, 테베는 사선대형 전술을 준비함에 이어서 전투 도중에 그 이점을 살릴 수 있는 부대의 능력과 적의 대응전술을 봉쇄하는 운용을 보여주었기에 역사대로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명장,그들은 이기는 싸움만 한다-임용한 p24 참조] 사선대형이 단순히 부대 배치를 하면 한쪽이 득을 보는 궁극기가 아니라 쌍방의 종합적 전술 역량의 대결이라는 것은, 그 뒤에 똑같이 테베와 스파르타가 맞붙은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전투에서 테베는 동일하게 사선대형 전술을 사용했고, 스파르타가 이 전술을 이미 알고 있음을 감안해서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고 기병대를 운용하는 등 노력했지만 스파르타 군이 이전과는 달리 보다 방어적인 전술로 대응하며 테베 주공에 버티기로 맞서자 스파르타 군의 주력을 깨뜨리는 댓가로 사령관 에파미논다스를 잃을 정도로 손실을 입었다. 지휘관을 잃은 테베는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이후 그리스의 패권다툼의 장에서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테베의 사선대형은 에파미논다스와 함께 테베에서 자취를 감췄으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이 개념을 계승하고 응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써먹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사선대형의 응용판을 써먹었다. 좌익과 중앙을 구성한 중장보병대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버티면서 서서히 뒤로 물러섰고 우익의 기병대가 빠르게 전진하여 사선대형을 구축하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페르시아]] 기병대가 빠져나가 비어버린 틈을 파고들어 적의 중앙을 공략, [[다리우스 3세|다리우스]]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적을 분쇄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57년 로스바흐와 [[로이텐 전투]]에서 썼는데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취약한 한 축은 서서히 물러나고 공격력을 강화한 한 축이 적을 분쇄하는 식이었다. [[나폴레옹]]은 사선대형을 아예 전술이 아니라 전략의 범위까지 키워버렸다.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예나 전투]]에서 한 개의 프랑스 군단이 [[프로이센]] 주력 군단을 묶어둔 사이 공격을 맡은 군단이 예나의 프로이센군을 휩쓸었다. 이후 나치의 프랑스 침공 역시 다수의 보병부대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공격하여 연합군 주력을 묶어둔 사이 하인츠 구데리안과 롬멜의 8개 기갑사단이 아르덴 고원을 돌파하는 거대한 사선진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