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성정책 (문단 편집) == 역사 == [[고구려]] 때부터 사성이 시작됐고 [[신라]] 때도 고구려 왕족 [[안승]]에게 신라식 성씨인 [[김씨]] 성을 내리는 등 사성이 종종 이뤄졌지만, 한국사에서 본격적으로 팍팍 내렸던 것은 [[후삼국시대]] 초창기의 [[고려]]였다. 사성정책은 태조 [[왕건]]이 [[후삼국]] 시기 지방의 유력한 [[호족(한국사)|호족]]들을 고려에 포섭하기 위해 그들에게 자신의 성이었던 [[개성 왕씨]] 혹은 아주 새로운 성씨를 내려주었던 정책을 일컫는 말이다. 당연히 허울좋은 왕 씨 성만 내려주고 땡이 아니다... [[왕족]]에 버금가는 관직과 토지가 뒤따랐고 이에 감격한 호족들은 왕건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면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이후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당연히 왕권이 안정되면서 왕족 혹은 [[종친]]이 기득권화 된 고려 중기 이후나 [[조선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어진, 어디까지나 혼란의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정책이었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 초기 [[왕씨 몰살]] 와중에 사성받았던 왕씨들은 대부분 왕씨를 받기 전 원래 성씨로 복성해서 탄압을 피했다. 고려 초기 이후에도 [[임진왜란]] 때의 [[김충선]] 등 혼란한 시대 위주로 가끔씩 행해졌다. 이 사성정책과 관련된 야사가 있다. [[이덕형]]이 [[임진왜란]]에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접대할 때, 이여송은 이덕형이 이산해의 사위란 것을 알고 이를 보고 근친상간이라 여겨 짐승만도 못한다고 하였다. 이를 본 이항복이 그 명나라 장수에게 원래 이덕형은 김씨 성이었는데 재주가 뛰어나 임금이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하여 이덕형이 되었다고 뻥을 쳐서 무마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여송은 국성을 하사받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를 오해하여 박대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이후 이덕형에게 더 예를 갖추어 대했다.[* 이덕형은 [[광주 이씨]]이고,이산해는 [[한산 이씨]]이다. 물론 본관이 같아야 근친상간으로 치지만, 중국에선 본관을 따지지 않고 같은 성씨끼리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당연히 국성을 하사 받은 것도 아니다. 그냥 이항복이 조선과 명의 문화 차이까지 들어가는 기나긴 설명은 해주기 귀찮았는지 적당이 뻥쳐서 넘긴 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