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육신 (문단 편집) === 역사성 논란 === 많은 이들이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사실 역사적 인물인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많지도 않고 연구도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사육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설 육신전의 영향이며 오늘날 한국사 주요 키워드로 사육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다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육신전 문제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서 굉장히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사림의 일파인 김종직, 김굉필, 남효온 등으로 이어지는 학파적 정당성 문제가 있다. 사림의 학맥의 큰 줄기 중 하나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묘 배향 18현에도 포함된 [[김굉필]]의 활동으로 실록에 실리면서 일어난 일이 [[무오사화]]였다. 조선 왕실은 세조의 후손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사림들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들의 선배들의 정통성을 복원하면서도 세조의 후손이 왕으로 있는 조선 왕실에 출사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모순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세조의 정통성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하는 대신에 사육신의 충성심만 강조한다라는 편법이었다. 이는 [[정몽주]]와 같은 조선 건국 반대파를 띄운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 관계 역시 문제가 된다. 세조는 대표적인 왕권 지상주의자였고, 대간들은 딱 그 반대였다. 때문에 세조 직계가 왕위를 계승해 나가고 명분상 중흥의 군주로 대우받음에도 유학자인 신하들 입장에선 마냥 긍정하긴 껄끄러운 군주였다. 당대에도 마찬가지라서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선 인물들의 상당수는 세조 즉위 후 왕권주의 일변도로 나가 때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거나 정계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부류들이다. 조선의 통치철학인 성리학적 명분론과 정통성의 문제도 있다. 사림 내부나 명분상으로는 대표적 간판이고 현재로서도 이 부분이 가장 강조되긴 하는데, 정작 조선 시대에는 대놓고 언급하기도 뭐하고 진짜로 깊게 파고들수도 없는 부분이 이 대목이다. "단종이 정통성이 있고, 세조는 없다"라고 하면 간편해보이지만,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조선의 왕실은 세조의 직계로 이어졌고 단종의 후대는 끊어졌다. 사림도 관직에 나가지 않을 수는 없어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이나 그 제자인 김굉필만 해도 세조 당대나 예종, 성종 시기에는 관직에 나서있었다. 이는 정통성이 없는 왕 밑에서 일하는 것이 되므로 완벽한 모순을 이룬다. 게다가 관련된 인사들이 소속된 가문의 지위 문제 역시 빠지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는 유명 인사의 몇 대손도 그 조상의 이득을 봤고, 역적이나 반역자로 찍히면 그 가문은 몇 대가 지나가도 그로 인한 피해를 봤다. 주요 관련자의 직손들이야 대부분 죽었다고 하지만 엮여있는 가문들이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육신전에는 이런 다양한 문제가 무척이나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리고 육신전은 성리학적 명분론 관점에서 긍정되어서 조선 후기를 풍미하였고 이 이데올로기는 민간까지 퍼져서 특정 인물이 지은 소설이 야사처럼 전해지면서 이미지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당 분야는 굉장히 조심해서 봐야 한다. 배경이 소설이고 이게 이미지화된 경우에는 이들에 대한 미화를 걷어내는 작업이 주의깊게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실제 생애는 '당에서 인정받은 천재가 국가적 한계에 의해서 좌절하게 되는' [[최고운전]]의 이미지와 다르다. 소설 [[임경업전]] 속의 조선 후기 최대의 명장은 역사 인물 [[임경업]]과는 유사성이 그리 크지 않다. [[소설 동의보감]]에 묘사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낸 심의는 실제 역사 기록 속의 [[허준]]의 생애와 차이가 크다. [[임진록]]에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 [[사명당]]이 실제 조선 승려 유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육신전과 비슷한 시대를 그린 고전소설 [[운영전]]에서 묘사된 [[안평대군]]은 역사적 인물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육신전 속 안평대군과도 다르다.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육신전 속 사육신은 어떨까? 고민할 대목이다. 단적으로 학계에서 [[계유정난]]을 연구하는 이들의 연구 속에서 사육신의 상당수는 계유정난에 협조, 동조, 적어도 방관했던 인물들로 평가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실 동조 안 하면 "날 죽여라!" 라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기는 했다.(박시백 등의 평가) 우선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야 한다. 조선은 오늘날처럼 [[표현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전근대적인 왕조국가인데다, [[계유정난]]은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지라 [[수양대군]] 반대파들도 아닌 밤중에 날벼락 격이였다. 또한 현대에는 [[사자명예훼손죄]]라는 법이 존재하고 사육신 관련 문중의 영향력이 아직도 막강하다. 어디까지나 직계 친족들이 화를 당한 것이지 '''관련 집안들은 아직도 존재한다.''' 이개만 하더라도 이개 직속 친족들만 죽었지 정작 이개의 일부 친인척들은 세조에게 부역한 공신이라서 잘 나갔다. 물론 이들 후손도 당연히 이개에 대해서 자랑스러운 자신들 집안의 선조로 모시는 중. 박팽년, 하위지는 아예 직계 후손들이 살아남았다. 이러한 한국 현실에서 이런 역사 [[수정주의]]적 입장들이 양지로 나오기는 쉽지 않다. 당장 아래의 사칠신 논쟁에서 엿볼 수 있듯이 조상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문중의 호전성은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다. 사육신들이 죽기 전에 썼다는 일종의 절명시들이 구전되는데, 일단 죽기 전에 시나 읊고 있을 만큼 여유로웠던 상황이 아닌만큼[* 박팽년의 경우는 애초에 정식으로 처형되기 전에 고문으로 죽었다.] 절명시가 아니라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고, 시의 저자가 해당 인물인지도 의심을 받고 있다. 죽음과 연관이 조금 적은 시들로 저자가 시에 조예가 있는 인물이라면 그나마 연결 고리를 찾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후대에 저자 불명인 시들을 해당 인물과 엮은 결과물일 뿐이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