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할린 (문단 편집) === 근현대 === [[17세기]]~[[18세기]]에는 [[청나라]]의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에도 막부|일본]]과 [[러시아 제국|러시아]]가 각각 남부와 북부를 중심으로 [[식민]][[개척]]을 시작하였고 이러한 역사가 훗날 러일 양국이 사할린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일본의 경우 [[에도 시대]] 초기인 [[1679년]]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에 [[마츠마에 번]]이 어장을 설치한 것이 그 시초이며 러시아는 그보다 조금 늦은 18세기 초반에 [[시베리아]]에서 [[외만주]], [[연해주]]로부터 내려와 사할린 서북부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보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양국의 사할린 점유 양상은 어디까지나 섬의 해안가 일부 거점을 설치하는 수준에 그쳤고 [[중화제국|중국]] 역시 형식적인 [[조공]] 선에서 만족했을 뿐 이 섬에 유의미한 지배력을 보이지 않았기에 이 시기부터 사할린이 러시아나 일본,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하기에는 빈약하다.[* 일례로 [[홋카이도]]와 비교했을 때 두 섬 모두 19세기에 와서 중앙 정부에 의한 개발과 주민 이주가 본격화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홋카이도는 에조치라 불렸음에도 이미 [[15세기]] 중반 일본의 진출이 시작한 이래, 17~18세기경 [[다이묘]] 가문인 [[마츠마에 번]]의 주도 하에 일본인들이 홋카이도 해안가 전역에 진출했고 홋카이도 아이누를 형식적으로 [[번(제후국)|번]]의 지배 하에 복속해 관리했기 때문에 러시아도 홋카이도를 일본의 영토로 인식하며 관심에 두지 않았다. 즉,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개척하고 [[오호츠크 해]]로 진출한 18세기 무렵 홋카이도 전역이 이미 마츠마에 번의 완전한 통제 하에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도 이곳에 손쓸 겨를이 없었다. 반면 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일본 본토인 [[혼슈]]에서 너무 멀고 일본인의 진출과 원주민의 복속 정도가 매우 약했으며 특히 사할린은 일본인의 거주지가 오도마리(코르사코프)를 비롯한 섬 남부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남북으로 길쭉한 사할린의 지형상 러시아가 무리없이 식민 정책을 펼 수 있는 제반 환경이었다.] 단, [[윌타]]나 [[니브흐]], [[사할린 아이누]]가 국가적 실체를 구성하지 못했으며 이들은 경제적으로 각각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1806년]] 러시아의 통상 요구를 에도 막부가 거부하자 러시아 해군은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 ]]등지에 위치한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여 파괴한 후 사할린을 러시아령으로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07년]] [[에도 막부]]가 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일본령으로 선포했으며 그러한 선언의 일환으로 [[1809년]]에 [[일본]]의 탐험가인 마미야 린조가 막부의 지원 하에 지금의 [[타타르 해협]]까지 탐사했고 사할린이 [[섬]]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때문에 훗날 사할린 남부가 [[화태청|가라후토]]라는 이름으로 일본령이 되었을 때 이 해협이 [[마미야 해협]]으로 불리기도 했다.] 결국 러시아와 일본 간 사할린과 쿠릴을 둘러 싼 신경전 끝에 [[1855년]] 러일화친조약(일본명 시모다 조약)이 체결되었고 조약에 따라 사할린은 양국의 공동 관할구역이 되었다. 러일화친조약 체결 이후에도 사할린에 대한 양국의 경쟁은 지속되었으며 공동 관할지라는 어정쩡한 지위로 인해 양국 거류민간 마찰도 잦았다. 게다가 [[1868년]]에야 [[메이지 유신|근대화]]를 시작한 일본으로서는 [[강대국]] 러시아와의 영향력 경쟁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비교적 가치가 떨어지는 사할린 섬을 두고 러시아와 직접적인 마찰을 빚고 싶지도 않았다.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일본 내에서는 사할린을 본래의 영향권에 따라 50도선, 혹은 4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분할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일본과의 파워 게임에 자신이 있던 러시아는 북쿠릴 열도를 일부 내주더라도 사할린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응수했다. 게다가 [[본토]]의 일부인 [[홋카이도 개척사|홋카이도 개척]]마저 아직 완전히 완료되지 않은 시점에서 식민지인 사할린까지 동시에 개척하는 것은 신생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었다. 러시아보다 먼저 사할린에 진출했고 사할린이 섬임을 먼저 밝혀낸 일본도 어떻게든 사수하고자 했지만 결국 여러모로 골칫거리인 사할린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1875년]]에 체결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일본명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으로 인해 [[쿠릴 열도]] 전도를 일본이 영유하는 대신 사할린의 전역이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일본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은근히 [[불평등조약]]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사할린에 비해 쿠릴 열도가 너무 협소하기 때문이다. 실제 사할린 내에서의 파워 게임에서 신생 근대화 국가인 일본은 대제국인 러시아와 겨룰 힘이 없었지만 형식적인 수준의 평등 조약을 맺어 국제사회에서의 체면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사할린에서 물러나는 대신 쿠릴 열도를 양도받았다. 다만 쿠릴 열도는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단순 면적만으로 두 지역의 가치를 비교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 이후 일본인들과 일본의 영향력 하에 예속되어 있던 [[사할린 아이누]]들은 대거 홋카이도 등 일본 본토로 이주하였고 사할린 섬 전역에 러시아 식민자들이 대거 입식했다. 당시 사할린은 유럽 러시아와 거리가 멀어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여 열악했고 이러한 상황은 저명한 문호인 [[안톤 체호프]]의 <사할린 섬>에도 묘사되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 말미에 [[일본군]]은 사할린 섬을 단숨에 점령했고 전후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본래 일본의 영향권이던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는 일본령으로 재편입되었으며 일본은 이 지역에 가라후토 민정서를 설치하였다. 이후 [[1907년]]에는 가라후토 민정서를 [[가라후토 청]]으로 개편하였으며, 그 이후에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이 사할린 섬의 남쪽을 40년간 지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령 가라후토]] 문서 참고. 한편 1905년 이후에도 북사할린은 러시아의 영토로 남았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뒤 [[러시아 내전]]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간섭한 일본군이 [[1925년]]까지 사할린 전역을 지배했다. [[러시아 혁명]]의 결과로 갓 출범한 신생 [[소련]] 정권은 [[유럽 러시아]]를 간수하기 바빠 사할린 개발에 소극적이었으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섬의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 양도했다. 또 [[레닌]]은 사할린 영유를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 레닌만의 주장은 아니고 [[안톤 체호프]]도 기행문에서 사할린은 원래 일본의 땅이라고 기록하는 등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사할린은 일본으로부터 획득한 [[외지]]로 여겨졌다. 이는 지구 반대편의 [[유럽 러시아|유럽 러시아인]]들 입장에서 사할린이 일본과 같은 섬인데다 지리적으로 일본 열도의 일부이고 [[러시아인]]들이 처음 발견한 시점에 코르사코프를 비롯한 섬 남부에 이미 일본인 정착촌이 소규모나마 존재했으며 초기에는 일본이 사할린을 더욱 적극적으로 탐사하는 등 한층 더 강한 역사적 클레임을 가졌기 때문이다. 반면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직접 답사를 수행한 18세기 러시아 탐험대는 느슨하게나마 마츠마에 번의 통제 하에 있던 홋카이도는 대체로 일본령으로 인식한 반면 일본인의 활동이 적었던 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러시아가 개척할 수 있는 사실상의 빈 땅으로 인식했다.] 일본에 사할린 섬 전체를 반환하려고 했지만 결국 [[1925년]] 일본이 소련을 승인하고 북사할린에서 스스로 철수하면서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일본이 가라후토를 내지로 편입하는 행정조치를 취했으나 오래 못가 [[1945년]]에 패망하였고 이 과정에서 [[만주 작전]]으로 [[남사할린 침공|소련군이 기습적으로 가라후토를 함락하여]] 섬 전체가 다시 소련-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전쟁 이전 북사할린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하바롭스크 지방]]에 예속되어 있었으나, 소련이 [[2차 세계 대전]] [[일본의 항복|종전]] 이후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를 통째로 흡수하였다.[* [[소련군]]은 [[일본의 항복]] 이후인 8월 26일에 사할린을, 9월 4일에 쿠릴 열도를 완전히 장악했다. 9월 2일에 일본이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는데 하보마이와 시코탄 등을 항복 조인식 시점까지 점령하지 못한 상태였다. 참고로 스탈린은 [[홋카이도]]까지 침공해 [[쿠시로시|쿠시로]]-[[루모이시|루모이]] 선을 경계로 홋카이도를 분할하는 계획도 구상했으나 이는 남사할린과 [[슘슈 섬 전투|슘슈 섬에서의 출혈]] 및 [[미국]]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7월 이후 북사할린, 남사할린, 쿠릴 열도까지 포함해서 1947년 [[사할린 주]]로 독립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일본은 [[1949년]] 가라후토청을 폐지한데 이어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사할린 남부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였고 현재까지 러시아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