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산당 (문단 편집) == 상세 == 『당의통략(黨議通略)』에 따르면, [[인조]]조 말년 서인은 [[낙당]](原黨)·[[원당(붕당)|원당]]·산당·[[한당(붕당)|한당]](漢黨) 등으로 분화되었다. 형성된 이유는 [[소현세자]] 사망 뒤 동생인 [[봉림대군]][* 즉 [[효종(조선)|효종]]이다.]이 세자가 되고, 소현세자의 빈인 [[강빈]]이 역모에 연계되고 사사되는 과정에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산당은 [[강빈]]의 사면을 주장했으며 반청파였다. 산당의 유래는 [[호서]]의 회덕 등 지방의 처사, 유림와 유생 중심 정치세력을 말한다. 그러나 출신지, 거주지에 따라 정치 성향이 갈린 건 아니었다. 산당은 [[낙당]]과 [[원당(붕당)|원당]]의 주도권 강화를 위한 명분을 위해 산당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산당은 정국의 일신을 위해 원당의 퇴출을 추진했다. 일례로 [[효종(조선)|효종]]이 즉위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6월 22일, [[송준길]]은 삼사 관원들을 동원해 [[김자점]]과 [[원두표]] 등의 정사공신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였다. 결국 [[효종(조선)|효종]]조 초에 [[김자점]]과 [[원두표]]와 그들의 세력들은 파직당하거나 전향했다. 산림의 등장은 실무 그룹이자 기득권인 한당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청서]]의 중심이자 척화파였던 청음 [[김상헌(조선)|김상헌]]을 잇는 명분론의 거두로 등장한 우암 [[송시열]]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증가할수록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 한당뿐 아니라 산당은 임금인 [[효종(조선)|효종]]과도 자주 대립했는데 효종이 북벌을 주장하면서 대립 관계에서 협력/연합 관계로 뒤바뀌었다. 사실 둘의 생각은 달랐는데, 효종은 북벌등 무력 통치 행위를 통한 통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롯한 산당은 임금도 유학자라며 유교적 이상을 조선에 실현하려 했다. 신권 강화를 원하는 [[송시열]]과 왕권 강화를 원하는 효종은 배청/반청 등 겹치는 한 주장에 의해서 연합했지만 끝까지 대립했다. 산당은 [[효종(조선)|효종]]과 [[현종(조선)|현종]]조 너무 비대해진 나머지 [[현종(조선)|현종]]조 말기에 돼서야 산당과 타 [[서인]] 붕당, [[남인]]의 균형을 맞추었으나 [[숙종(조선)|숙종]]때 잦은 환국으로 가장 많은 피해를 입고 [[송시열]]이 사사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에 너무 많이 퍼져 있었기에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고 [[한당(붕당)|한당]]과 [[노론]]으로 발전했다. 현재의 폴리페서(Polifessor)라고 불릴 수도 있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