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시대 (문단 편집) === 삼국 이외의 국가 === 이런저런 대체표현이 제기되고 있지만 '삼국 시대'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에게 [[고조선]] 이후의 [[한국사]]를 설명하는 일반 용어로 굳게 자리잡았고, 이로 인해 제법 이름이 알려진 [[네임드]] 국가들도 삼국의 성장 과정에서 먹힌 잡몹 취급 당하고 있다. 대략 다음과 같은 국가들이 피해자. * [[가야]] 제국(諸國): 삼한 중 변한이 거의 그대로 계승된 체제. 그나마 고백신 삼국 이외에는 가장 많이 알려져 교과서의 지도에도 일일이 표시되는 국가 모임이다. 교과서에서는 [[금관국|금관가야]]가 532년, [[대가야]]가 562년 멸망했다고 하지만 문헌에 따라 가야라는 범주에 묶이는 국가의 수는 5개 ~ 40개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난다.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전까지는 가야 연맹이 신라와 국력적으로 비등, 해상 장악력에 있어서는 압도하고 있었기에, 가야가 융성할 당시에 삼국시대를 대입한다면 국력 순은 고구려, 백제, 가야 순이다. 대체적인 판도는 현재의 [[경상남도]] 대부분[* 경남 동쪽 끝 [[양산시]]는 가야의 영향이 있긴 했지만 진한 문화권에 가깝고 문헌에서도 신라와 가야의 전선이 양산 아래 황산하([[낙동강]])에서 형성된 기록이 등장한다. 그리고 경남 서쪽 끝 [[남해군]]은 발굴조사 결과 일찍부터 백제 세력권에 편입되었고 이곳을 통해 일본과 교류하는 항해로를 이용했음이 밝혀졌다.] 및 [[경상북도]] 서부[* 3세기 초반까지 김천, 구미, 상주, 문경 일대까지, 4세기 후반까지는 성주, 경산, 대구 일대까지, 그 이후엔 고령 일대만 통치했다.]와 [[전라도]] 동부[* 5세기 중반 이후 한정. 지역은 구례, 광양, 순천, 장수, 진안, 임실, 남원, 곡성, 여수]. * 육가야: 가장 유명한 가야의 모임이지만, 전기를 주도한 [[금관국|금관가야]]와 후기를 주도한 [[대가야]] 정도만 아는 사람이 태반이다. 성산가야와 고령가야는 아는 게 더 신기할 정도로 내용이 없는게 사실이지만, 6세기 국제정세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아라가야]]와 [[포상팔국의 난]] 등에서 행적을 남긴 [[소가야]]는 행적에 비해 매우 초라하다. * [[부여]](북부여, 동부여): 북부여는 494년 동부여는 410년에 고구려에 멸망. 3세기 초반까지는 고구려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그러나 285년 [[선비(민족)|선비]]의 습격으로 큰 타격을 입은 뒤 [[물길]]에 치이다가 [[고구려]]에 실질적으로 병합된 뒤 5세기까지 존속. 현재의 송화강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 일대. 고조선과 존속기간이 수백 년이나 겹칠 정도로 먼저 성립했고 고구려나 백제도 부여를 계승했다고 자처했으며, 수백 년 후에도 부여의 후손임을 내세운 나라가 있을 정도로 나름 위상이 있는 나라인데... 지못미. * [[두막루]]: 동부여 멸망 이후 ~ 8세기 초엽에 쑹화강(송화강) 이북의 샤오싱안링(소흥안령)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 [[북부여]]의 유민이라고 자처했지만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 [[최씨낙랑국|낙랑국]]: 서기 30년대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멸망. 현재까지 평양설과 함경도 함흥설 등이 대립 중이다. * [[옥저]] 동옥저는 56년 고구려에 멸망, 남옥저는 260년 백제에 멸망, 북옥저는 285년 동부여로 형성. 현재의 북간도, 함경도, 강원도 북쪽 일대. * [[동예]]: [[낙랑군]]-[[위나라]], [[고구려]]와 [[신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400년 정도까지 존속. 현재의 [[강원도]] [[영동]] 일대. * [[목지국]]: [[고이왕]] 혹은 [[책계왕]] 때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설이 유력. 백제가 강성하기 전까지 [[마한]]의 영도국이었고, 마한을 주도했던 나라라 그런지 목지국이 아니라 그냥 마한이라고 표기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크게 약해졌으되 나름의 세력은 보유하였고, 더 이상의 저항 여력이 완전히 없어졌다 싶은 시기는 고고학적으론, 비류왕 치세 말기에서 근초고왕 치세 초기 쯤인 4세기 초중반으로 해석된다. * [[침미다례]]: 전남 서남해안 일대의, 신미국을 필두로 한 영산강 유역 세력일 개연성이 가장 크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목지국 다음으로 마한에서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고학적으로도 부합하는 사실이다. 다만 369년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나오는 일본서기 기사는 다소 오버. 도륙당했다는 표현이 부합하는 건 그 중 가장 세력이 커서 영산강 유역을 아우르던 한 소국이었던 걸로 보이며, 이후에도 영산강 유역 세력권은 동성~무령왕의 시기까지도 독자적인 운동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목지국 이후 [[마한]]의 주도국이 되었다는 오해가 있는데 이건 완전 틀리게 알려진 사실이다. 마한의 주도국은 목지국이 타멸된 후에는 어디까지나 가장 크고 강력한 [[백제]]국이었고, 다만 침미다례 세력이 마한의 잔여 소국들 중 그나마 가장 크고 부강했던 데다 백제국과 거리도 멀어 직접 지배 지역으로 편제되는 시기가 늦었을 뿐이다. 이 침미다례 세력이 전남 혹은 전라도 전체를 국가로서 실체를 갖고 아우르며 백제와 맞섰다는 이상한 이해도 퍼져 있는데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침미다례는 실제론 전남 지역의 서남쪽 1/3만 커버했었고, 전남 남해안 및 전남 중동부를 중심으로 하는 또 다른 고고학적 세력은 침미다례와는 이해관계가 또 달랐다. 다만 그나마 부강해서 백제에게 약간 더 게기다가 이름이라도 남긴 침미다례와는 달리, 이쪽은 백제의 견제와 간섭을 더욱 심하게 받았던 데다, 그나마 융성을 누렸을 때는 대가야가 주도하는 가야 연맹으로 넘어가 있었기에 이름도 못 남겼다는 게 다를 뿐이다. 같은 마한 소속이었으나 침미다례, 백제와 이해관계가 달랐던 이 전라도 동부 소국 세력은, 굳이 말하자면 전라도 가야 세력이라고 부를 순 있을 것이다. * [[탐라국]]: 498년부터 백제의 부용국화, 662년 신라의 부용국화. 왕조로만 따지면 [[고려]] 시대에도 [[왕건]] 대 부용하여 생존(!)했으나(사실상 중앙정부 지배는 받으나 자치권을 보장받은 [[자치령]] 시기) [[숙종(고려)|숙종]] 대 완전히 군현 체제에 진입했으며, 그나마 명목상 제주도의 군주인 탐라국 왕가는 [[성주(칭호)|성주]]라는 이름으로 조선초까지 계속 세습됐다. 현재의 [[제주도]]. * [[우산국]]: 512년 신라의 장군 [[김이사부]]가 정벌, 신라의 속국이 되었고 930년 고려에 의해 완전 합병. 현재의 [[울릉도]](흔히 [[독도]]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모두 독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 기타 [[마한]], [[진한]], [[변한]]으로 분류되는 수십 개의 군장 국가들: 대부분 이름과 위치만 겨우 남아있거나 백제, 신라에 언제 어떻게 정복당했다.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 파편적인 기록만이 남아있어 [[고고학]]과 결합해 겨우 더듬어간다. ------ 이 수 많은 국가들 중 율령제를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고 삼국시대 마지막 백여 년간 한국사의 패권을 두고 실질적으로 경쟁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세 나라 [[고구려]], [[백제]], [[신라]]뿐이므로 삼국시대라는 단어 자체는 타당성이 높은 편이다. [[가야]]를 감안해 삼국 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간혹 제기되지만 어차피 사국 시대라는 주장은 맞지 않는다. 애초에 가야는 다른 삼국과 달리 1개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나라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기도 하고, 아래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듯 가야 말고도 비슷한 시기 여기저기에 나라가 많았기 때문에 오직 4개 나라만 있었던 적은 없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대가야가 말기에는 나름대로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했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실증 자료를 찾기 힘들고, 규모도 작은 탓에 대부분의 인식은 중앙 집권화에 실패한 연맹체 또는 소국들이 모여 있는 지역이라는 입장이다. 최근에는 가야라는 이름이 연맹 왕국이 아니라 그냥 특정 지역을 통째로 가리키는 명칭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가야]] 문서 참고.) [[구삼국사]], [[삼국사기]]의 기초가 되는 사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사서와 후대의 명칭 등을 보면 최소한 [[고려]] 시대부터는 '이 시절은 삼국 시대'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던 것 같으니 지금 와서 고친다는 것도 당위성이 떨어지는 말이기는 하다. 대개의 고대 국가들이 그러하듯 정확한 시작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학계 공통으로 정확히 끝났다고 평가되는 연도는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당나라]] 세력을 축출하고 통일을 완성한 676년. 아주 간략화해 설명하는 경우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을 삼국시대의 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당과 얽혀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잔여 세력과 영토를 신라가 흡수한 것이 [[나당전쟁]] 와중이므로 676년을 끝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건국되어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터를 잡으면서 [[남북국시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삼국 시대는 삼국 중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일본]] 국가의 형성에 굉장히 영향을 많이 주었던 시기이며, 일본인들의 직간접적인 조상들이 이 시대에 한반도에서 건너가기도 했다.[* 물론 삼국 간에도 일본에 준 영향력 정도의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백제>>>고구려>신라.] 심지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와 백제인의 후예들이 1300년도 더 전에 멸망해버린 조국을 기리는 [[신사]]들도 여전히 있을 정도. (대표적으로 고구려를 기리는 히다카 시에 위치한 [[고마 신사]]). 그야말로 [[재일교포]] 0세대. 물론 더 나중에 망한 신라를 기리는 신사들 역시 많이 남아있고 [[가야]] 신사도 있다.[* 고고학적 조사에 의하면 삼국 시대 중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집단 이주가 가장 많이 일어났던 시기는 [[광개토대왕]]의 가야 공격 즈음으로 추정된다.] 이 삼국 시대란 용어는 다소 사후처리적인 용어인데, 어떤 통일 정권이 삼국으로 분립된 게 아니라 삼국이 신라로 정리된 이후에 이전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삼국 시대라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중국)|중국의 삼국시대]]와 명칭이 같지만 중국의 삼국은 하나의 통일 왕조가 멸망하고 다음 통일 왕조가 들어서기 이전의 혼란기, 과도기라는 점, 기간의 차이에서 그나마 한국사의 [[후삼국시대]]와 비교될 수 있다. 한국사의 원삼국과 삼국 시대는 아직 통일 왕국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소국들이 서로 경쟁하고 병합하면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서 한국사 버전 [[춘추전국시대]]에 가깝다.[* 사실 은, 주 시대, 즉 춘추 전국 시대 이전의 양쯔강 일대는 중원과 정체성 자체가 아예 달랐다. 애초에 초나라부터가 아예 주나라와 그 산하의 수많은 제후국에 속하지 않은 묘족의 국가에서 출발했다는 말도 있고 초나라 이남으로 가면 한장어족이 아니라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나 오스트로네시아어 등의 언어를 쓰던 종족들이 살고 있었으니 말 다한 셈. 한반도에서도 초기철기시대가 개막할 무렵에는 이전 한반도 남부 청동기문화를 이끌었던 송국리문화와 주로 울산과 그 이북지역에서 확산된 검단리문화, 춘천 중도유형을 위시한 크로노프카 문화 및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한반도로 이주해온 점토대토기 문화 등 다양한 문화유형이 공존하고 있었다.][* 다만 흔히 인터넷 상의 [[반도 일본어설]] 지지자들이 단순화하는 대로 송국리문화=일본어족 / 점토대토기문화=예맥족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근거는 고고학 상에서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점토대토기문화가 이주해오면서 재지문화가 약세를 이루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일부 지역에서는 이주민인 점토대토기문화가 역으로 재지민에 동화되어 사라진 경우도 있다.(박진일, 서울경기지방 점토대토기 문화 시론) 오히려 근래 밝혀지는 양상은 점토대토기문화가 이주한 이후 재지 문화와 관계를 맺는 양상은 결코 일률적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송국리문화와 같은 재지문화와 점진적으로 융합, 통합되는 가운데에 지속적으로 중국계 문물을 수용하고 있는 양상에 가깝다.(진영민, 중서부지방 점토대토기문화 취락의 변천과 성격) 오히려 흔히 [[반도 일본어설]] 지지자들이 이주민에 밀려 사라졌다고 자극적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로 송국리문화는 점토대토기문화 및 중국계 철기 문화가 유입되는 가운데에서도 기원 이후까지 뚜렷한 족적을 남기다가 삼한 계열 정치체로 연속되기도 한다.(김규정, 호남지역 마한 성립기 주거지 일고찰) 요컨대 기원전후한 무렵 한반도는 다양한 출자와 전통을 가진 문화유형이 공존하고 있는 와중에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 흡수, 동화, 재편되는 과정을 따라 점진적으로 통합되어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어느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일본 열도로 밀어냈다는 식의 자극적인 주장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