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연의/피해자 (문단 편집) === [[초주]] === [[정사 삼국지|정사]]에서는 정치적, 학문적으로도 실적을 쌓았으며, 시류와 현실에도 어둡지 않은 유능한 인물로 나왔으며, [[제갈량]]의 북벌에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갈량]]이 죽었을 때 먼저 달려간 사람은 [[초주]]였다. 물론 마지막 순간에 항복을 주장했지만 이는 무조건 항복이 아니었으며, 협상을 통해 [[유선(삼국지)|유선]]의 안위문제 및 성도의 치안문제 등을 해결하였다. 항복하자는 행동도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초주]]를 매국노라 욕하는 건 너무 심한 평가다. 정치적 스탠스 자체가 [[삼국지연의|연의]]의 [[십자포화#s-2|십자포화]]를 맞기 딱 좋은 위치여서, [[삼국지연의|연의]]에서는 그저 [[제갈량]] 북벌 반대론자에 항복주의자로 나왔다. 게다가 첫 등장 장면이 유장에게 항복을 권하는 것이었는데 유비가 익주를 접수할 당시 초주는 아직 어린이일 뿐이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시종일관 부정적인 발언을 하고 틈만 나면 "항복해야", "전쟁은 하지 말아야","우리 군주 이름이 재수가 없으니 망할 것 같네요"라고 도참론에 빠져서 주장했던 것은 역사적으로도 사실이다. 위나라가 공격해 오기 전에도 이미 왜 반역죄로 처벌받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의 발언을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으며 천명은 위나라에 있다거나, 유비의 이름자인 '비'는 준비한다는 뜻이고 유선의 이름자인 '선'은 바친다는 뜻이니 촉나라는 위나라에 바쳐질 운명이라는 등등. 이 때문인지 초주의 제자들 가운데 필두로 취급받은 나헌이나 진수 같은 사람은 촉한 조정에서 중용을 받지 못했고 촉내에서 그를 존중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며 진지의 협조 하에 지은 구국론을 사람들이 살펴보려 함이 없었다(人莫察焉)거나 하는 기록들이 나온다. 거기에 촉한 멸망 이후 당대 인사들이나 후대의 역사가들이 강유나 염우, 곽익, 나헌의 군대가 오고 있었고 그 근왕군을 가지고 싸울 수 있었는데 왜 항복했냐의 문제에 따라 유선과 초주의 처지를 비판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판단은 알아서 할 것. 또한 정사의 저자인 [[진수(역사가)|진수]]의 '''스승'''인 만큼 정사에서의 묘사를 참고할 때도 어느 정도 필터링이 필요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