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syyWf7tcQJw)] }}} || {{{+1 三國統一戰爭}}} [[대한민국|한국]] [[고대]] [[삼국시대]] 말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결과 그로 인한 신라의 삼국통일과정, 그리고 이 과정 속에 [[중국]]의 [[통일]] [[제국]]들과 [[일본]], 북방 [[유목|유목민족]], 넒게 보면 [[티베트]]에 이르기까지 얽힌 [[전쟁]], [[전투]]와 [[외교]]에 대한 총괄적인 문서. >“과인의 시대는 운이 어지러울 시기에 속하고 때는 다투어 싸우던 때였다. > >[[백제|서쪽]]을 정벌하고 [[고구려|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당나라|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고구려부흥운동|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삼국통일|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살펴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곡식이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 >'''"이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에,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 >'''[[문무왕]]의 유언.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 >'''"옛날엔 조그마했던 [[고구려|세]] [[백제|나]][[신라|라]]가, 이제는 장하게도 [[통일신라|한 집]]이 되었다."'''[* 이는 그렇게 틀린 얘긴 아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도 고구려 유민 상당수는 평양 및 황해도 일대에 남아 있었고 이들이 바로 후삼국 통일의 주역인 패서호족들의 선조다. 물론 통일신라 시대에는 구주 중 하나를 이루지도 못하고 한주 아래에 있었지만 그건 [[예성강]]~[[대동강]] 구간이 인구가 적어서가 아니라 신라의 통제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랬기에 이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이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려|고구려를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후 신라가 한주에서 독립된 [[패강진]]이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설치하기도 하는데 군사적 기능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강력한 [[행정]]을 관철하진 못했다.) 어찌되었든 신라는 [[황해도]]와 평남 남부를 명목상 병합했고 원래 고구려의 중심지는 만주가 아니라 [[평안도]], 황해도였음을 감안하면 통일신라가 큰 집을 이뤘다고 자부할 만한 근거는 있었다.][* '[[당나라]]가 고구려인 대부분을 [[중원]]으로 끌고 갔으니 이후 한국사는 고구려와 무관하며 고구려의 알맹이는 신라가 가져간 게 별로 없다'라는 [[동북공정]]식 헛소리가 다름아닌 한국 내에도 퍼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동서고금 사례를 통틀어봐도 인구 수백만인 국가의 [[주민]] 대부분을 다 잡아가서 사민하는 건 불가능하며,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그리고 애초에 당나라로 끌고 갔던 고구려인들도 상당수는 탈출해서 [[발해]]의 건국에 기여했다.][* 물론 [[고구려]] 하나보다 작은데 '옛날엔 조그마했던 세 나라' 운운하는 것은 지적할 만하다.] >---- >'''[[최치원]],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 > '''한국사에서 가장 거대한 영향력을 끼친 사건''' 중의 하나. >----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9 한국사에 있어서 삼국시대의 삼국이라고 하면 위에 쓴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말하지만, 사실 엄밀히 따지면 [[부여]], [[가야]] 등을 제외한 삼국만이 남아있던 시대는 562년~660년 뿐, 고작 98년이다. 그러나 이 수많은 국가들 중 율령제를 통해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세 나라뿐이였고 6세기까지 잔존한 마한이나 가야계열 소국들은 역사 흐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피동적인 성향의 군소 정치체에 불과했기에 삼국시대라는 단어 자체는 타당성이 높은 편이다.[* 물론 [[가야]] 등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다. [[삼국시대]] 문서 참고.]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완성된 [[중앙집권제|중앙 집권 국가]]인 삼국은 그 이전보다 훨씬 치열한 규모로 전쟁을 벌였고, 이는 결국 상대 나라의 멸망과 분열로 이어져 [[삼국시대]]의 종말, 그리고 [[통일신라]] 혹은 30년 뒤에 세워지는 [[발해]]와의 [[남북국시대]]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었다. 삼국 외에 [[탐라]]나 중국의 [[수나라|수]], [[당나라|당]]과 일본의 [[왜|왜국]](倭國)이 직접적으로 참여했으며, [[돌궐]], [[철륵]](鐵勒), [[해]](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이 당군의 일원 등으로 동원되어 참전하였다. [[거란]]과 [[말갈]]의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하여 전투하였다. 그리고 [[몽골]] 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薛延陀)는 직접 개입하여 [[한반도]] 혹은 [[만주]]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해, [[오르도스]](ordos)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吐蕃)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바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삼국통일전쟁은 가히 [[파미르 고원]](Pamir Plat) 이동 지역 대다수의 나라와 종족들이 직·간접으로 관계된 국제전이라 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 변동은 직·간접적으로 크든 작든 삼국통일전쟁의 진행에 영향을 미쳤다. [[임진왜란]], [[원말명초]][* 홍건적, 왜구, 여진족, 한반도 왕조, 중원왕조, 일본, 몽골 지역에 이르기까지 정세변동이 일어났다.]와 더불어 '''[[동아시아]] 대전'''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국제 전쟁. 이 삼국통일전쟁 과정은 한국사에서 매우 많이 논의되었던 연구 주제이고, 세세한 부분에 대한 논의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본적인 개념 설정에서부터 국내외 여러 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