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4세기 후반설 === [[4세기]] 전반 [[낙랑군]],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국경을 접하게 된 고구려와 백제가 옛 중국 군현 지역 지배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쟁을 벌인 데서부터 통일 전쟁의 시작을 설정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당시 양국은 중앙 집권적 영역 국가 체제의 구축을 지향하였으며, 전쟁으로 획득한 영토와 주민을 중앙 정부가 직접 장악하여 통치하려 했다. 이런 영역 국가 체제로의 발전에 필연적으로 고구려와 백제 간에 더 많은 영토와 주민 획득을 위한 상쟁이 벌어졌고, 신라도 뒤이어 영역 국가 체제로 발전해 이 대열에 참가하게 되어 삼국 간의 혈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다시 말해서, '''[[광개토대왕]]이 사망한 이후부터를 삼국통일전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을 때는 수만 명이 동원되던 대규모 전쟁은 막대한 인력과 물자의 징발을 요구했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 삼국은 조직력, 동원력 확충에 거의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 과정 속에 새로운 야철 기술 보급, 수리시설 확충 등의 생산력 정진에 성공하고, 관등제 정비, 중앙 관서 조직과 지방제도 확충이 이루어지는 등 중앙 집권적 영역 국가 체제로의 진전이 있었고, 삼국통일은 4세기 중엽 이후 장장 3백여 년에 걸쳐 벌어진 움직임의 산물로 보아야 하며, 이 과정 속에 한국 고대 사회가 [[중세]] 사회로 전환하였다고 보는 시각이다. 즉, 이러한 담론에서 삼국통일 전쟁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고대에서 중세로 전환하는 진통이었다는 것이다.[* 김기흥,『삼국 및 통일신라 체제의 연구』] 통일신라 시기를 중세로 볼 수 있느냐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 점은 삼국통일 전쟁의 근본적 동인을 삼국 사회 내부의 변화와 발견에서 찾은 견해로서 거시적 관점에서 통일 전쟁의 역사적 성격을 조망하는 부분이다. 다만 이는 삼국통일전쟁이라는 제한된 용어를 지나치게 거대하게 부풀려 잡은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흔히 [[근초고왕]]이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말하지만 실제 학계에서는 "백제의 전성기"라는 것 자체가 허상이며, 실제로는 200~300년 이상 벌어져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격차를 좁히는 시기이고, 중국 쪽의 혼란으로 인해 야기된 '''"고구려의 암흑기"'''에 오히려 가깝다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별다른 대실책을 벌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주의 사망으로 멸망의 위기까지 몰렸던 고구려가 [[소수림왕|내부를 정비]]하자마자 [[광개토대왕|백제를 속절없이 털었다]]는 것으로서 증명된다. 그리고 이어서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5대에 걸쳐 고구려는 무려 160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했으며, 특히 장수왕에서 안장왕에 걸치는 시기에는 신라와 백제가 거의 성읍국가 수준까지 퇴락했었다. 이 때문에 이 기간을 과연 "삼국통일전쟁"에 넣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상 장수왕에서 안장왕 기간 동안에는 '''고구려가 통일을 해 버린 상태나 다름없었고'''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산발적인 소요 외에 별다른 대규모 도발이 없었다.[* 이런저런 기사가 있지만 정말 쉴새없이 근성으로 수천에서 수만 단위의 군대를 일으켜 도전하던 아신왕 시절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글자 그대로 소요이다.] 그러니까 애시당초 '''전쟁'''의 기간이 아닌데, 왜 이 기간을 전쟁 취급하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다만, [[문자명왕]] 시기에는 신라가 [[지증왕]]이라는 걸출한 명군의 영도 아래 국경지대에 성 40여 개를 쌓고 급격히 힘을 길렀으며, 백제는 [[무령왕]]이라는 시대의 정복군주를 맞아 [[침미다례]]의 기나긴 저항을 끝장내고 한강 일대까지 잠시 탈환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