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신라의 움직임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왕 대의 백제와 신라의 충돌 지점.jpg|width=100%]]}}} || || {{{#000000 [[무왕(백제)|무왕]] 즉위 이후 신라와의 전투 지점들. 가장 짙은 색인 남원 운봉은 [[아막성 전투]]가 벌어진 지점이다. }}} || 신라 역시 백제와 마찬가지로 수나라의 개입을 바라고 있었다. [[진평왕]](眞平王) 시절 신라에 대한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이 가중되었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불과 1년만인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605년 8월에는 역으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보기도 했지만 608년 2월에는 고구려가 신라 변경을 침략하여 8천여 명을 잡아가 버렸다. 다시 2개월 뒤인 4월에는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공략해서 함락시켰다. 611년 음력 10월에는 백제 군대가 가잠성(椵岑城)을 100일간 포위한 끝에, 결사항전을 한 [[찬덕]](讚德)이 죽고 성이 함락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견딜 수가 없었던 신라는 611년, 수나라와 연락하여 군사를 청하였고, 수양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611년 2월, 마침내 수양제가 움직였다. 자세한 전황에 관해서는 [[고구려-수 전쟁]] 문서 참고. 간단하게 결과만 놓고 보자면 '''수나라의 멸망이었다.''' 특히 2차 침공에서는 '''113만 3천 8백 명'''을 끌고왔는데도 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