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대야성의 참극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대야성 전투(642년))] 641년 3월, 백제의 [[무왕(백제)|무왕]]이 사망하고 [[의자왕]]이 즉위하였다. 의자왕은 궁정 내부의 문제를 정리한 뒤 곧바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의자왕은 642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獼猴城) 등 40여 성을 공략하였다. 단기간에 새로운 군주의 지도력을 과시하는 데는 전승 이상만한 것도 없으니. 이후에도 의자왕은 계속해서 공세의 고삐를 조였다. 다음달 8월에는 신라의 대당 교통로인 당항성을 고구려와 협력하여 공략하려 하였으며, 장군 [[윤충]]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 전투(642년)|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은 신라의 낙동강 서쪽 지역을 전수하는 요충지였다. 백제는 [[무왕(백제)|무왕]] 대에 [[무산성]]과 [[속함성]] 등을 공략하여 [[소백산맥]] 이동으로 진출하였는데, 더 나아가 [[황강]] 유역의 대야성을 공략하려 하였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신라의 도독 [[김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윤충이 이끈 백제병이 대야성을 포위하였는데, 대야성은 내부가 더 문제였다. 성주 [[김품석]]은 여색을 밝히는 [[색골]]이었고, 자신의 참모인 [[검일]](黔日)의 부인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듣자 불륜을 저질렀다. 이를 갈던 검일은 백제군이 성을 포위하자 창고에 불을 질러 호응하였다. 화염이 치솟고 민심이 흉흉하여 상황이 어려워졌는데, [[죽죽]](竹竹) 등은 끝까지 싸우자고 하였으나 김품석은 항복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도 여의치 않아서 처자식을 죽이고 자결하였다. 죽죽 등은 최후까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대야성이 함락되자 신라 조정이 당혹스러워했다. 대야성 함락으로 백제군은 낙동강 본류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어, 신라의 본거지를 바로 위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울러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이 함락됨에 따라 낙동강 서안 옛 가야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이 뿌리채 흔들릴 위기에 처해졌다. 그리고 김춘추는,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 >'''《[[삼국사기]]》 권 제5 신라본기 제5''' 김춘추는 사위와 딸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몹시 곤궁해진 상황이 되었다. 대야성 성주 김품석의 입신에는 아무래도 장인인 김춘추의 영향력이 있었을텐데, 대야성 상실의 주요 원인이 김품석의 부도덕 행위이니 이것은 김춘추에게 큰 짐이 된다. 김춘추는 대안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번 사태는 1차적으로 백제의 공세로 벌어졌다. 즉, 해결하려면 백제를 압박해야 하는데, 당장 638년에도 고구려와 [[칠중성]]에서 격전을 벌인 바 있던 신라로서는 고구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왜국]]은 신라를 외교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 해 10월, 마침 고구려에서 일대 파란이 일어났다. [[연개소문]]의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