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김춘추의 당나라 방문 ==== 마침 신라에는 당나라와의 연호 사용 문제가 발생했다. 648년 3월, 당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에게 당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것을 문제 제기했고, 이는 신라가 정변 이후 새로운 왕이 즉위한 것을 기회로 삼아 신경전을 벌이는것으로 보여진다. 그러자 일본에서 돌아온 김춘추가 당나라로 파견되었다. 당태종은 김춘추를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으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 그를 영접하는 등,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김춘추에게는 정2품인 특진의 관작을 주었고 춘추의 아들 [[김문왕]](金文王)에게 정3품의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봉하였다. 당시 당 조정은 수년째 치고 빠지는 기습전으로 고구려를 괴롭히고 있었다. 소모전 결과 고구려가 피폐해졌다는 보고를 접한 당태종은 다음 단계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 전면적 공격에 나서겠다고 다시 한번 선포하였다. >○ 二十二年, 又遣右武衛將軍薛萬徹等往靑丘道伐之, 萬徹渡海入鴨綠水, 進破其泊灼城, 俘獲甚衆. 太宗又命江南造大船, 遣陝州刺史孫伏伽召募勇敢之士, 萊州刺史李道裕運糧及器械, 貯於烏胡島, 將欲大擧以伐高麗. 未行而帝崩. 高宗嗣位, 又命兵部尙書任雅相·左武衛大將軍蘇定方·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等前後討之, 皆無大功而還. > >○ 22년에 또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설만철]](薜萬徹) 등을 보내어 청구도(靑丘道)로 가서 치게 하니, 만철(萬徹)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압록수|鴨綠水]]로 들어가서 [[박작성]](泊灼城)을 함락하고 많은 포로를 사로잡았다. [[당태종|태종(太宗)]]께서는 강남(江南)에 명하여 큰 배를 건조하게 하는 한편, 합주자사(陜州刺史) 손복가(孫伏伽)를 보내어 용감한 병사를 모집시키고, 협주자사(莢州刺史) 이도유(李道裕)를 보내어 군량과 병기를 운반하여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는 등 장차 군사를 크게 일으켜 고려(高麗)를 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태종(太宗)께서 [[붕어]]하셨다. [[당고종|고종]]께서 유지를 이어받아서 또 병부상서(兵部尙書) [[임아상]](任雅相),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계필하력]](契苾何力) 등에게 명하여 앞뒤로 보내어 토벌케 하였으나, 모두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 >'''《[[구당서]]》 권 제199 열전 제149 동이''' ---- >태종이 장군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 쳐들어왔다.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도달하여 진영을 멈추니,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이를 막았다. 만철(萬徹)이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이기니, 우리 병력이 무너졌다. 행방 등이 병력을 보내 성을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방어시설을 해놓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지만 빼앗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이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병력 3만여 인을 거느리고 나와 지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아군이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는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명령하여 양곡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쌓아두게 하고 장차 한꺼번에 크게 공격하려 하였다. >---- >'''《[[삼국사기]]》권 제10 고구려본기 보장왕''' 이런 방책과 함께 당태종이 645년 전쟁 이후로는, 대고구려전의 새로운 전략으로 주목하게 된 것이 고구려 [[양면전쟁|서부 국경선 이외에 타방면에 제2전선을 구축]], 고구려의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가장 중요한 군수품 보급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세력을 찾는 데 집중하였다. 따라서 앞으로의 고구려-당 전쟁의 향방에 있어서, 신라의 중요성이 급부상하게 되었다.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 당나라가 백제, 신라에 군사 협조를 촉구하였지만, 실제로는 전쟁 자체에서 거의 한반도 남부 세력의 원조를 크게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전쟁 과정에서 이 문제로 말이 나온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차례 패배를 당한 상황에서는 또 이야기가 달라, 이런 과정에서 김춘추에 대한 환대가 더욱 커졌던 것이다. 김춘추는 당태종 이세민을 비롯한 당 조정의 중신들과 교류했고, 돌아오면서 아들 [[김문왕]]을 [[시안(도시)|장안]]에 머물게 하였다. 이제 신라는 당과 교섭하는데 유리한 거점을 확보했고, 김춘추 개인으로서도 자신의 아들을 당 조정에 두어 당나라 유력자들과 교류하게 함으로서, 다른 진골귀족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김문왕이 귀국한 후에도 김춘추는 훗날 문무왕이 되는 아들 [[문무왕|김법민]](金法旼)을 650년 당나라에 파견하는 등 당나라와의 교섭을 주도하였다. 또, 이때 당태종과 김춘추 사이에서 주목되는 것이 문무왕이 671년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는 이해 7월에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신라가 신의를 등지고 당을 공격한 것을 힐난하는 서한을 보내온 데에 대한 답신 형태로 보낸 것이었다. 여기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배신을 언급하면서, 구체적으로 648년에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뒤, 대동강 이남 지역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이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태종 무열왕|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 문황제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平壤) 이남과 백제 땅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이 기록은 [[삼국사기]] 외에 보이지 않고, 어디까지나 당과의 개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신라가 일방적인 주장을 펼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김춘추와 당태종 간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별도의 공식적 기록으로 남지 않았을 수도 있으며, 당시 고구려 원정을 앞둔 당태종의 입장에선 그런 식으로 김춘추를 회유하려 할 수도 있다. 648년에 두 사람이 평양 이남 지역을 신라령으로 한다고 약속한다면, 이는 곧바로 바로 그때 당군이 백제 공략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향후에 벌어진 대백제 전쟁 등의 군사동맹의 큰 틀은 바로 이때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서 확정지은 것이 된다. 물론 아직 그런 것들은 구체화되진 않았다. 당에서 귀국한 김춘추는 신라 조정에 건의하여 관복의 양식을 바꾸어 당과 같이 하였으며, 그간 행해왔던 신라 고유의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했다. 신라가 취한 조치는 신라가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것이었다. >하쿠치(白雉)[* [[코토쿠 덴노]]가 650년 3월 22일부터 654년 11월 24일까지 사용한 연호.] 2년(652) 여름 6월 백제(百濟)·신라(新羅)가 사신을 보내 조(調)와 물건을 바쳤다. >이 해 신라(新羅)의 공조사(貢調使) 지만사손(知萬沙飡)[* 치마사산(チマササン)이라는 훈이 달려 있다.] 등이 당나라의 옷을 입고 츠쿠시(筑紫)[* 현재의 후쿠오카]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함부로 풍속을 바꾼 것을 싫어하여 꾸짖고 돌려 보냈다. 그 때 코세노오오미(巨勢大臣)[* 오오미(大臣)는 카바네(姓)로 추정되며 본명은 기재되지 않았다.]가 “지금 신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그 정벌하는 상황은 모든 힘을 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니와진(難波津)[* 현재의 [[오사카]]시 난바(難波) 일대를 말한다.]으로부터 츠쿠시해(筑紫海)[* 현재의 후쿠오카시 인근 바다] 가운데까지 서로 이어지도록 배를 가득 띄우고 신라를 불러 그 죄를 묻는다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청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5 [[코토쿠 덴노]](孝徳 天皇)''' 이때 신라가 650년부터 656년 사이 왜국에 해마다 사신을 파견하자, 왜국은 신라 사신이 당 양식의 새로운 관복을 입고 왜국을 방문한 것을 보고 극렬한 반응을 보이며 접견을 거부했다. 왜국에 있어 신라의 당복 착용은 당과 연결한 신라가 노골적으로 왜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신라 입장에선 당나라와 자신들의 결속을 과시하며, 왜국의 선택을 촉구하는 방향도 있을 것이다. 백제, 고구려 등의 압력에 시달리는 신라로서는 배후의 왜국에 대해 항시 민감한 주의가 필요했다. 신라로선 당과의 동맹을 확실히 하고 백제와의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왜국의 미온적인 태도는 불안인 동시에 위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관복 시위도 하면서 해마다 사신을 보내었지만, 왜국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계속하자 신라 역시 왜국과의 관계에 매달리기보다 대결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657년 왜국 조정이, 사신과 유학생들이 신라를 거쳐 당나라에 파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신라 조정은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왜국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신라와 왜국 사이의 공식적 접촉은 단절되었다. 이제 동북 아시아의 국제 관계의 구도는 점차 명확해졌다. '''당나라와 신라를 연결하는 횡적인 연결'''과, '''고구려와 백제, 왜국이 연계하는 종적인 연결'''이 그것이었다. [[합종연횡]]의 움직임 속에서 전쟁의 폭풍이 한반도를 휘감아 몰아치려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