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백제 내부의 혼란 === >16년 봄 3월에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는데,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해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 권 제28 백제본기 제6''' [[삼천궁녀]] 이야기야 훨씬 후대에나 나온 야사이니 그렇다치더라도, 그 이전까지 해동증자라는 언급까지 나오며 좋은 면모만 보였던 의자왕이 갑자기 폭정을 저지르고 향락에 빠졌다, 라는 평가를 받으며 충신을 옥에 가두는 의아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삼국사기에서만 나타나는 기록이 아니라 백제 [[사비성]]의 주요 사찰인 [[정림사]](定林寺)의 그 유명한 오층탑에 새겨 넣은 대당평제비(大唐平濟碑)에도 비슷한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항차 밖으로 곧은 신하는 버리고 안으로 요사스러운 부인을 믿어, 형벌은 오직 충직스럽고 어진 자에게만 미치고 총애와 신임은 아첨하는 자에게 먼저 더해졌다. >---- >'''『정림사지오층석탑 대당평백제비명』''' 친백제적이었던 일본의 일본서기에도 이러한 언급이 있다.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의 [[일본세기]](日本世記)[* 일본서기가 아니다. 즉 해당 기록은 일본서기가 이 일본세기의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에 "7월에 운운, 춘추지(春秋智)가 대장군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하였다. 왕의 대부인이 요사스럽고 무도하여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초래하였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일본서기]]》 권26 [[사이메이 덴노]](斉明 天皇)''' 주목할 만한 것은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임금의 부인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표현이다. 정확히 누군가를 말하는지도 알 수 없고[* [[일본서기]]에 기록된 의자왕의 처 [[은고]]로 추정하기도 한다.], 임금의 권한과 그 부인이 맞섰다는 것인지, 혹은 임금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렸다는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의자왕의 뒤를 이을 [[태자]]가 의자왕 초기엔 [[부여융]]인데, 의자왕 후기로 가면 [[부여효]]가 태자고 부여융은 일반 왕자로 기록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도중에 태자가 교체되었다고 보며, 나아가 위에서 말한 '임금의 부인'이 부여효의 생모고 태자 교체도 의자왕 시대 권력다툼의 결과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부인의 존재가 기록된 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은 그 뜻을 풀어보면 알 수 있듯 당나라가 백제를 절벌한 뒤 소정방이 지시하여 정벌 과정을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새긴 것이다. 즉, 당대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나열하기 보단 당나라의 입장에서 백제를 공격하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자왕을 깎아내렸을 확률이 높다. 일본서기의 내용 역시 잘 살펴보면 일본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도현(道顯)이라는 인물이 쓴 《[[일본세기]](日本世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도현이라는 인물이 고구려인이라는 언급만 몇번 있을 뿐 정확히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다만 기록을 종합해볼 때 도현은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일본세기를 작성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삼국에 대한 정보는 고구려의 사신을 통해 전해 들은 것으로 보인다. 재밌는 점은 대당평백제비명과 일본서기 양쪽에서 '요사스러운 부인'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해당 인물의 언급이 전혀 없으며, 심지어 옥중에서 성충이 올린 마지막 상소에도 부인이나 간신들을 멀리 하라는 충고가 적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도현이라는 인물이 전해들은 이야기가 당나라나 신라에서 왜곡시킨 정보일 가능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쓰여진 삼국사기의 내용은 어떠할까. 우선 첫 문장부터 '왕이 음란과 향락에 빠졌다.' 라고 시작하면서 성충을 옥사하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성충이 올린 상소의 내용이 심상치 않다. 성충 자신이 상소에 썼듯이, 성충은 감옥에서 목숨이 다하기 직전 마지막 충성심으로 왕에게 직언을 하고자 했다. 참수당해 죽나 옥중에서 굶어 죽나 죽는것은 매한가지인데 왕에게 무슨 말인들 못했을까. 하지만 상소문을 읽어보면 '사치', '향락', '음란'과 같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성충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충이 걱정한 의자왕의 모습은 주지육림을 즐기는 폭군의 모습이 아닌, 당나라가 공격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안일한 의자왕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의자왕의 생전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있지 않은 한 어느쪽이던 단정짓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종합하자면 실제로 의자왕이 폭정을 일삼았을 수도 있으나,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을 일삼은 모습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은 점, 의자왕이 사치를 부렸다고 언급되어 있는 기록은 대부분 당과 신라의 입장에서 백제 정벌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앞서 등장한다는 점, 성충이 옥중에서 마지막으로 올린 상소에도 의자왕이 폭정을 행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 등을 미루어볼 때, 의자왕이 말년에 비뚤어졌다는 것은 후대에 왜곡된 것이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자왕은 초기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쓴 군주인 만큼, 성충을 감옥에 가둔 것은 정치적 숙청의 의미가 더 강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약간의 추측을 더하자면, 당과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물론 의자왕의 예상도 아예 터무니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아무리 당나라가 당대 최고의 세계 제국이었다해도 13만이나 되는 대군을 그 큰 황해를 건너 수송해와 상륙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을까? 이 정도 규모의 상륙작전은 수양제의 고구려 정벌전은 물론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신라와의 전쟁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는 의자왕과, 언젠간 당나라가 공격할 것으로 내다보고 외교 정책을 바꾸고자 하는 성충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게는 애석하게도 결과적으로 성충의 예상이 정확히 적중했으며, 계속되는 숙청으로 삐걱대는 군주와 신하들간의 관계는 서서히 백제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 660년, 백제에게 멸망의 암운이 드리우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