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나당연합군의 진격 === 당나라는 대백제전에 앞서 위협요소를 먼저 제거하였다. 당의 서부 지역에서 [[서돌궐]]의 아사나하로(阿史那賀魯), 즉 [[사발라가한]](沙鉢羅)이 노실필 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서부의 칸국을 부활시켰고, 곧바로 중국의 종주권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제거하거나 적어도 통제하지 않고는 한반도 방면의 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당나라는 이에 따라 [[소정방]](蘇定方)을 사령관으로 하는 원정군을 구성하여, 바람이 휘몰아치는 서북의 황야로 출정하였다. 소정방은 10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를 나갔다고 하는,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서 태어난 인물이었다. 구당서에서는 그를 날쌔고 사납고 힘이 셈, 담력이 대단히 뛰어남, 등의 수식어로 묘사하고 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두 자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고, 소정방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안개는 어디든지 어둡게 만든다. 바람은 얼음같이 사납다. 야만인들은 우리가 이런 계절에 원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신속히 진군하여 그들을 놀라게 해주자." >---- >'''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소정방은 [[준가리아]]의 에비 노르 근처에 있는 보로탈라 강에서 [[아사나하로]]와 조우하여 정말로 그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어 그를 이식쿨의 서쪽에 있는 추 강가에서 대파하여 [[타슈켄트]](Toshkent)로 달아나게 했다. 타슈켄트인들은 [[아사나하로]]를 잡아서 중국으로 보냈다. 659년에는 [[도만]](都曼)이 소륵(疏勒[* [[카슈가르]]])·주구파(朱俱波[* [[카르가리크]]])·알반타(謁般陀[* [[타슈쿠르간 타지크 자치현|타슈쿠르간]]]) 등 3국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소정방은 안무대사(按撫大使)에 임명되어 반란을 평정했다. 이제 당나라의 천하는 [[천산]]과 [[파미르]]를 넘어가고 있었다. 한편 당은 백제 공략전에 앞서 658년과 659년 고구려 서부 국경에 공격전을 감행하였다. 658년에는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설인귀]]가 고구려의 [[적봉진]](赤峰鎭)을 습격해 함락하였으며, 659년 11월에는 [[계필하력]](契苾何力)과 [[설인귀]]가 [[요동]]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는 제1, 2차 고구려-당 전쟁처럼 본격적인 침공은 아니었지만 언제 후속타가 날아올 지 알 수 없는 고구려는 방어력을 서부 국경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당은 이로 인해 백제를 공략하려 하면서 고구려가 개입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양동작전을 구사했다.[* 결국 고구려는 백제가 망하고도 세 달이 지난 660년 10월에야 [[칠중성 전투|칠중성]]을 비롯한 신라 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도 후술할 [[백제부흥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셈이라 완전히 무의미하진 않았지만, 이미 백제 중심부가 무너진 뒤에야 [[뒷북]]을 친 셈이다.] 659년 당나라에는 [[왜국]]의 사신이 와 있었는데, 백제의 동맹인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 백제공략전 준비와 관련한 정보가 새버릴 수 있기 때문에 당나라는 이들을 감금했다. 백제 공략전이 기습적으로 전개된 것을 보면 전쟁 준비는 최대한 은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서북면에서 [[소정방]]이 [[도만]]을 사로잡아, 낙양의 건양전에 바친 것이 현경 5년 정월. 그리고 곧바로 3월이 되자 소정방은 대총관(大摠管)에 임명되어 백제 전선에 파견되었다. 원정군의 숫자는 모두 13만의 대군. 삼국유사에서는 향기(鄕記)를 인용해 당군 병력이 12만 2711명, 배는 1천 9백 척이라고 기록하였다. 이와 동시에 신라에서도 [[무열왕]]과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이 5월 26일 수도 [[서라벌]]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는 남천정(오늘날의 [[경기도]] [[이천]])에 이르렀다. 6월 21일 무열왕은 태자 [[김법민]]을 배 100척 규모의 신라 수군과 함께 [[서해]]의 덕물도로 파견하여 당군을 영접하게 하였다. 이상훈 교수는 이 100척이 원래 서해안 [[당항성]]에 소속된 수군이며[* 신라 서해안과 신라 남해안 사이에 백제가 있기 때문에 함대 간 신속한 연계가 힘들기 때문.] 승선 인원은 약 6,500명으로 추산했으며[* 삼국유사의 12만 2711명에 이 6,500여명을 더하면 대략 반올림하여 여러 사서에 기록된 13만이 된다.] 신라 수군 지휘관은 병부령 [[김진주]]와 장군 [[천존]]으로 추정했다.[* 이 두 사람은 무열왕, 김유신과 함께 서라벌을 출발했는데 [[황산벌 전투]]에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당군과 함께 금강 하구로 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양측은 7월 10일,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백제를 협공해 백제의 수도에서 만나기로 일정을 맞추었다. 신라 최고의 명장 김유신이 이끄는 병력은 모두 5만. 당나라 부대의 절반 정도 되는 숫자였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육군은 7월 9일, [[황산벌]]로 나아갔고, 신라군 수군이 가세한 당군은 덕물도에서 10여 일 이상 항해의 피로를 풀고 휴식을 충분하게 취한 뒤, 서해안 연안을 따라 항해해 백강구(白江口, 오늘날의 [[금강]])를 바라보고 진격하였다. 서쪽과 동쪽에서 도합 20여만에 가까운 대군이 백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제 측은 덕적도에서 나당연합군이 만났음에도 이 때까지는 백제가 이를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완전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수나라 때부터 서해를 횡단하여서 고구려 평양으로 직공하던 적이 몇 번 있었고, 전과는 달리 약간 남쪽으로 오기는 하였지만, 신라왕이 군대를 이끌고 한강유역까지 북상하였기에 황해도를 공격해서 평양으로 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늦어도 이후 덕적도에서 수군이 남하하면서 백제 영역인 [[당진]] 일대를 통과할 때쯤에는 백제도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