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연개소문의 사망과 후계자 구도 === 백제가 손쓸 새도 없이 무너진 충격 속에서도 고구려는 괴력을 발휘하며 또다시 당나라를 물리치는데 성공했으나 왜군은 백강 전투에서 궤멸당하여 한반도 전선에서 한 발 물러났기에 고구려는 양면으로 포위된 형국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는 여기서 더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봉선행사를 올리면서 동방정책에 대한 갈무리를 암시하고 있었다. 당의 전쟁의지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전란의 시대는 소강의 문턱에 올랐다. 하지만 문제는 내부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은 막리지, 대모달로서 군사권을 장악하여 국정을 주도하였다. 과도기를 거친 후엔 대대로가 되어 귀족 회의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을 부활시켰는데, 공고해진 자신의 권력을 귀족 회의라는 공식적인 기구를 통해 행사함으로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연개소문은 뒤이어 아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주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장남인 연남생은 묘지명에 따르면 이미 15살에 중리소형(中裏小兄)을, 18살엔 중리대형(中裏大兄), 23살엔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이 되었으며 이듬해 장군직을 받았고, 28세에는 막리지 삼군대장군이 되었으며 32세에 태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하였다. 이는 연남산도 비슷하며,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뒤이어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남생이 태막리지가 될 무렵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은 세 아들 중 누구 한명을 골라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았고, 세 아들 모두 군국의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그가 죽은 후에 권력 투쟁을 야기할 수도 있는 조치였다. 물론 세 아들이 협력을 하며 외적을 물리친다면야 죽은 연개소문이나 고구려 입장에선 아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어떻게 사람 마음대로 되겠는가. 특히나 자식 일이란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 이치다. >이 달에 고려 대신 개금이 죽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하기를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실로 그렇게 되었다. 그저 웃음거리가 되는 것보다는 더 심각한 일이었지만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