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평양성은 불타오르고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평양성 전투(668년))] [[연남생]]의 투항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이용, 당나라는 666년 12월, [[이세적]]을 사령관으로 한 50만 대군을 투입하였다. 667년 2월 이세적이 이끈 대군은 [[요하]]를 건너 [[신성#s-5]]을 포위하였다. 요동 방어선 북방의 최고 요충지인 신성은 수십만 당나라 군대에 맞서 수 개월간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9월 [[사부구]]라는 자가 신성 성주를 묶어서 당군에 항복함으로써 신성은 허무하게 당나라에 함락당하게 된다. 함락시킨 [[신성#s-5]]에 [[고간#s-3]](高侃) 등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이세적은 주력군을 이끌고 요동성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대응해 연남건은 요하 지류에 주둔하고 있던 수십만의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동원하여 신성 탈환에 나서며 한편으로는 소자하 유역의 목저성·창암성·남소성 등을 공격하여 재차 고구려 중앙 정부에 귀속시켰다. 그렇게 되자 신성의 당군과 연결이 차단된 국내성 지역의 남생군은 고립되었다. 만일 이 작전이 유효하게 전개되었다면 고구려는 국내성 지역을 회복하고 신성을 탈환, 이세적의 군대를 북쪽에서부터 압박하고 보급선을 위협하면서 지구전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희망사항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신성을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당군에게 격파당했고, 나아가 [[계필하력]]과 [[설인귀]]는 당군을 이끌고 소자하 유역에 진출, 고구려군을 박살내고 남생군과 다시 조우하였다. 이에 당군은 신성을 중심으로 동으로는 국내성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확보하고,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영역을 남북으로 양단하는 형세를 구축하였다. 당군은 이 축을 중심으로 점령지의 폭을 확대하면서 고구려의 숨통을 조였다.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본대는 신성을 떠나 16개 성을 한번에 쓸어버린 후, 압록강 하구에 있는것으로 알려진 대행성(大行城)으로 나아갔다. 국내성 방면으로 진격하던 계필하력의 당군도 오골성을 지나 대행성으로 나아가 이세적의 군단과 결합하였다. 이미 여기까지만 해도 고구려는 국가 존립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슬슬 신라군마저 북진을 개시하였다. 667년 이세적의 당군이 요동을 공격할때 신라는 [[파진찬]] 지경(智鏡)과 [[대아찬]] [[김개원]](愷元)을 요동 전선에 파견하였고, 당으로부터 평양성 공략전에 신라군이 합류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이에 따라 문무왕은 8월 김유신 등 장군 30여명을 거느리고 수도를 떠나 9월 한성정(漢城停)에 도착하여 당군이 평양으로 오기를 기다렸다. 같은 시기 당나라 장군 유인원과 신라 장수 김인태는 각각 백제 지역에 주둔하던 당군과 신라군을 거느리고 비열도(卑列島)를 따라 북진하였다. 10월 2일, 이세적은 평양성 북쪽 2백여리 지점까지 도달하였다. 그리고 촌주 대나마 강심을 거란병 80여기와 함께 한성에 파견, 신라군의 진격을 촉구하였고, 이에 응한 문무왕은 북진하여 11월 11일, 장새에 이르렀다. 그런데 11월 이세적의 군대가 회군하였다는 소식을 들어 별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다. 평양성 일대에서 당군이 철수하였지만, 당나라 군이 본토로 철수한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듬해 668년의 작전은 다시 요동에서부터 진군해야 한다. 하지만 668년 2월 [[설인귀]]는 당군을 끌고 북으로 진격하여 지금의 장춘 농안 지역에 있었던 북부여성을 공략하고, 부여천 일대의 30, 40여성을 점령하였다. 당은 이 작전으로 요서의 연군 ─ 통정진 ─ 신성으로 이어지는 당군의 주된 보급선을 북에서 위협할 수 있는 고구려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는 설인귀의 당군이 신성 상변에 주둔하던 당군 본영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진군했음을 말한다. 당군은 667년 11월 이후 당 본토와 연락이 용이한 요동의 신성과 요동성 일대로 전선을 축소하고, 국내성 일대의 남생군과 연결하여 방어에 임하면서 겨울을 버텨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영역에서 당군이 월동할 수 있음은 고구려의 저항력이 바닥에 바닥까지 약화되었음을 말한다. 충분히 휴식하고 보급을 받아 전력을 재정비한 당군은 668년 여름, 재차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신라군도 6월 21일 평양성을 향해 수도를 떠나 진발하였다. 신라군의 규모는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에 따르면 20만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다만 668년 시점까지 그동안 보여왔던 신라의 국력을 감안하면 20만 병력이라는 숫자는 과장인 것으로 보인다. 얼마 없는 기록들에서 나오는 660년 황산벌 전투의 50,000명의 전투서열을 보면 고구려와의 접경지역을 제외한 거의 신라 전국토에서 전력으로 모은 병력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이번에는 김유신이 고령에다 풍병에 시달리고 있어 수도에 머물면서 후방의 주요 문제를 총괄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쯤 되면 신라에서 김유신의 이름이 너무나 거대해진 탓에, 이때 떠나는 신라 장수들은 아픈 김유신 보고 제발 같이 가자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서 김유신 후손이 남긴 [[행장]]에서 가져온 열전에 있는 내용이라 신뢰하지 않는 시각도 있지만, 말년의 김유신이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영웅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것은 김유신을 딱히 띄울 필요가 없는 중국, 일본 측 기록에서도 나타나는 내용이라 그런 해프닝이 일어날만한 개연성은 있다.] 신라군 본대가 출진한 지 얼마 안 지나 6월 25일에는 고구려의 대곡성([[평산군]])과 황해도 신원군에 있는 [[한성]] 등 2군 12성이 웅진도독부에 항복하였다. 이제 한강 하류에서 대동강까지 신라군의 진격로는 문이 훤하게 열려졌다. 7월 16일 문무왕은 한성주로 행차하여 독전하였다. 신라군은 이렇게 황해도를 거의 무혈입성하고 평양 근교까지 다가갔고, 신라군에 대해 [[연남건]]은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군을 투입해 성문을 열고 평양성 동쪽 근교 사천 들판에서 신라군을 저지하려 하지만 [[김문영]]이 지휘하는 신라군이 크게 승리하고([[사천 전투]]), 남하한 당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포위했다. 마침내 9월 21일, 신라군과 당군이 회합하여 [[평양성 전투(668년)|평양성을 포위하였다.]] 이후 나당연합군이 포위한 [[평양성]]을 적극적으로 공격해 한 달 이상 많은 전투가 벌어졌는데,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의 [[논공행상]] 기사에 의하면 평양소성(平壤小城), 평양성 대문, 북문, 평양 남쪽 다리(南橋) 등 여러 장소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평양 군주 술탈(述脫)이 신라 한산주 소감 박경한(朴京漢)에게 죽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한다. 고구려는 이미 물리적으로는 역량이 바닥난지 오래고, 정신적인 저항력도 지배층끼리의 내분과 투항 등으로 고갈된지 오래였다. 한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당군에 항복했지만, [[연남건]]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자 평양성 방어 임무를 총괄하는 승려 [[신성(승려)|신성]](信誠)이 당군에 내응하여 성의 문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함에 따라 마지막 방어벽도 무너졌다. 연남건은 칼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포로]]가 되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한 영역을 차지하고, 기나긴 세월동안 동아시아 세력권의 한 자리를 차지했던 고구려는 이렇게 멸망했다. 당나라 부대는 성에 올라 북을 쳤고, 성에 불을 질렀다. 둥둥 북치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고구려는 무너져내렸다.[* 삼국사기에선 북을 치며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짦게 기술되나 19세기 초에 작성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와 [[구한말]]에 쓰여진 [[황현]]의 [[매천야록]]에선 [[이세적]]이 평양성 함락 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1A_0140_030_0070_2000_019_XML|고구려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고구려의 모든 책을 모은 후 [[https://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a&levelId=sa_001r_0060_0040_0090&types=r|후환을 없앤다고 모두 불태워 버렸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