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고구려 유민들의 에필로그 === 고구려 멸망 후 졸지에 '유민' 이 되어버린 고구려인들의 행보는 몇 갈래로 나뉘어졌다. [[평양성]] 함락 이후 [[이세적]]은 [[보장왕]] 이하 고구려 지배층을 포로로 잡아 회군하였다. 보장왕 등은 당군의 전승 기념 의식으로 [[당태종]]의 무덤에 포로로 바쳐졌으며, [[당고종]]에게 사죄하는 의례를 올려야 했다. 당고종은 보장왕에게 벼슬을 주었다. 연씨 삼형제 중 [[연남생]]은 '''고구려 공략에 힘쓴 군공'''을 인정받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의 벼슬을 받았고,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도 관직을 얻었다. 평양성에서 일찍 항복한 [[연남산]]은 사재소경(司宰小卿)에 임명되었다. 끝까지 저항한 [[연남건]]은 머나먼 중국 남부에 [[유배]]되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설인귀]]에게 20,000명의 병사를 주어 주둔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5부 176성 69만 호의 옛 고구려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재편하고 고구려인 가운데 투항하였거나 협력한 자들을 도독·자사·현령으로 임명하여 표면에 내세우고, 당나라인 관리가 실제적으로 통치하게 조처하며, 안동도호가 이들을 총괄하게 하였다. 새로이 행정 단위를 구획하는 등의 일에는 장안에 머물던 연남생이 깊이 간여하였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인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약화시켜 당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방책으로, 부유하고 힘 있는 고구려인을 당의 내지로 대거 강제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고구려 중심부 지역에 거주하던 유력한 민호 28,200여 호가 강제 이주당했고, 이는 고구려인 사회를 뿌리채 흔들어버리는 일이었다. 이에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당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무력 저항하였다. 또 다른 방책으로는 당의 지배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였는데, 전자의 경우는 [[검모잠]]의 봉기가 그 예에 해당한다. [[요동]] 지역에서도 고구려 유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당태종의 침공을 저지했던 [[안시성]]이 주요 근거지로, 다만 유민들의 무력 봉기는 서로간의 조직력 부족과 당군의 대처 때문에 673년 무렵까지는 거의 진압되었다. 이러한 반당 저항 운동 과정에서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나갔다. * 첫 번째는 [[신라]]로 합류한 이들로, 원주지가 신라로 병합되면서 귀속된 사람들과 [[연정토]] 등 처럼 집단적으로 신라에게 내투해온 이들이 있었다. 물론 전쟁 포로로 잡혀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 부흥운동 과정에서 활약하던 사람들은 전황이 좋지 않아 대부분 신라군으로 합류하였다. 다만 신라로 내투한 집단은 크게 세 부류가 있었는데 각기 입장은 조금씩 달랐다. 고구려 멸망 직후 내투했다가 전북 금마저로 사민된 부류,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패서 지역(지금의 [[황해도]] 일대)에 그대로 남은 부류, 그리고 [[대조영]] 집단과 함께 영주 지역에서 탈주하다가 요동 방면에서 남쪽으로 빠져 같은 고구려계들이 널리 분포했던 황해도 일대로 복귀한 부류.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후 이들은 한민족 역사에서 중심으로 올라서게 된다.''' 고구려의 제2수도권이었던 패서 지역은 평양에 비해 강제 이주가 그렇게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데다가 영주 방면에 있다가 탈주한 유민 집단의 합류로 더욱 고구려색이 짙어지게 되었고, 훗날 신라의 영향권 안으로는 들어갔으나 경주에서 워낙 거리가 먼 데다 신라가 세력을 뻗치기 전까지의 시간도 길었고 신라 정부 자체도 그렇게까지 중앙 행정력을 강하게 투사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 치하 옛 백제 지역보다는 훨씬 큰 자율성을 더 누리게 되었다. 황해도 서부 절반은 신라가 아예 군현 조차 설치하지 못하고, 황해도 서쪽 연안에 군부대 몇 개만 설치하여 간접 지배로 만족했을 정도. 덕택에 이들은 신라가 혼란기로 빠져들자 어렵지 않게 [[고려]]를 건국하고, 궁예의 힘을 빌려 옛 통일신라 영토의 절반 이상을 석권하면서 [[한민족]] 정체성의 뿌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만 백제의 제2수도인 금마저 일대로 일단 사민된 고구려 유민들은 보덕국 해체 과정에서 신라로 인해 강제로 '''익산에서 조차 쫓겨나서 그 이하 전라남북도 지역으로 분산되어 강제 사민'''당했고, 이 부류는 앞서 패서 지역에서 모여 정체성을 보존한 고구려 유민들과는 달리 옛 백제 지역의 백제 유민들 사이에서 분산당한 탓에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만다.[* 앗시리아로 인해 지금의 서이란 일대로 분산배치된 이스라엘 10부족은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말았으나, 신바빌로니아가 집단 이주시킨 유대인들은 정체성을 보존했던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 두 번째는 [[발해]]가 건국되면서 발해인이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계속 만주 지역에 거주하던 집단과, [[대조영]] 집단처럼 요서 지역의 영주 방면에 옮겨져 있다가 동으로 탈주한 집단, 그리고 요동 방면에서 동부 만주 지역으로 옮겨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광현]]의 내투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발해 멸망 즈음을 기점으로 해서 꽤 많은 수가 첫째 사례의 집단에게 합류한다. * 세 번째로는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집단도 있었다. [[일본세기]](日本世記)의 저자인 승려 도현(道顯)처럼 668년 이전에 일본에 갔다가 고구려가 망해버려 아예 그곳에 머문 사람들도 있고, 대부분은 고구려 멸망 이후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 네 번째는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이다. 세분하면 요서의 영주 지역에 정주하게 된 이, 농우도(隴右道) 방면 등 변경 지대로 옮겨진 이, 회하 유역 등 강회 방면에 배정된 이들로 나뉘어지는데 농우도 방면을 보면 지금의 [[산시성(섬서성)|산시성]](陕西省) 서부, [[간쑤성]] 지역 등으로 많이 옮겨졌다. 이 지역은 티베트와 몽골 고원의 유목민 세력의 연결을 차단한 긴 회랑 지대로서, 당은 고구려인들의 군사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정착시키고 단결병(團結兵)으로 편성하였다. 단결병은 이 지역의 자위를 위한 일종의 지방병이었다. 이 사람들의 후예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고선지]](高仙芝)이다. * 다섯 번째로는 [[몽골]] 고원의 유목민 사회로 이주한 사람들로, 당의 지배를 피해 집단으로 옮겨갔는데 게중에는 [[고문간]](高文簡)처럼 [[묵철가한]](默啜)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막리지'라 칭한 이도 있었다. 이들 중 고문간, 고공의(高拱毅), 고정부(高定傅) 등이 각각 이끄는 집단은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몽골 고원을 떠나 당으로 내투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주하였다. * 여섯 번째는 [[요동]] 지역에 그대로 머문 이들이다. 이 부류는 668년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 통치를 받았는데, 여러 차례의 저항과 당 내지로의 강제이주를 겪였고, 많은 수는 동만주나 몽골 고원 및 신라로 이주해 안동도호부에는 약하고 가난한 소수만 남게 되었다. 676년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건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했다. 그 일환으로 보장왕이 677년 고구려 유민과 함께 요동으로 귀환하여 고구려 유민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겼는데, 이 보장왕이 귀환한 후 얼마 안되어 속말말갈 등과 연결하여 당에 반대하는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당 내지로 유배되었고, 귀환 조치했던 고구려 유민은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