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통일전쟁 (문단 편집) === 말갈족의 행보 === 다수의 말갈족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었고, 상당수는 이런저런 경로로 고구려화되었다. 당사자들이야 별 문제는 없겠지만 당나라와 같은 제삼자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화 된 말갈족과 말갈족과 인접해서 살던 변경의 고구려인 등을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를테면 대조영에 대한 당나라 사서의 언급이 그렇다. 이렇게 관련이 깊다보니 말갈족은 고구려 지배 아래 고구려군에 많이 동원되었다. 당연히 고구려 멸망은 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수나라 대의 말갈 7부 중에 [[백산말갈|백산(白山)부]], [[백돌말갈|백돌(伯咄)부]], 안거골(安車骨)부, 호실(號室)부 등은 분산되어 미약해졌다. 그 밖에 [[속말말갈|속말부]]는 속말수 유역에 거주하던 [[돌지계]] 집단 등 일부가 이미 그 이전에 수나라에 투항하여 당군에 종군하였다. 돌지계의 아들이자 나당전쟁에서 활약한 [[이근행]]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이다. 속말부의 나머지는 고구려에 복속하여 대당전에 참여하였다. [[걸사비우]](乞四比羽)가 대표적이다. 668년 이후 말갈족의 기존 질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고구려에 충성하던 유력 말갈 촌락들은 전란의 피해를 입어 약화되었고, 하위 촌락들이 이탈과 저항을 하였다. 668년 이후 [[월희말갈|월희부(越喜部)]], [[철리말갈|철리부(鐵利部)]] 등 새로운 집단이 출현하였고, 고구려 세력권 밖에 있던 [[흑수말갈|흑수부]]가 강성해졌다.[* 다만 강성해졌다는 흑수부도 대추장이 없고 16개 부족으로 나뉘어 자치를 영위하였다.] 또 [[나당전쟁]]이 한반도 중, 남부에서 펼쳐지고, 신라가 당나라의 공격을 격파함으로서, 중·동부 만주는 당과 신라, 돌궐 등 어느 국가도 세력을 뻗치지 못하는 국제적인 힘의 공백 지대가 되었다. 대내적으로도 고구려인과 말갈족의 여러 집단이 소규모 단위로 흩어져 자치를 영위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들 집단을 규합하는 새로운 정치적 구심력 형성은 7세기 말 요서 지역에서 탈주해온 대조영 집단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동안의 신라는 당나라의 직접적인 야욕에서 한발자국 물러나서 버티고 있을 수 있었다. 당나라의 목표가 고구려의 소멸인 만큼, 고구려가 멸망하지 않았는데 신라를 건드릴 순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종이 호랑이로 전락한 고구려의 패망이 눈 앞에 보이자, 전쟁의 징조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668년 9월 12일, 신라 사신 김동암(金東嚴)이 [[왜국]]을 방문하였다. 신라와 왜국의 국교가 단절된지 11년 만이었다. 자세한 목적은 전해지지 않으나, 김동암이 왜국을 찾은 시점이 고구려 멸망 직전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11월 5일 김동암은 귀국했고, 그 뒤 [[나당전쟁]]이 발발하였다. 이에 따라 김동암이 당시에 반당적인 주장을 했고, 이를 전제로 해서 양국의 화평과 국교 회복 제의가 있었으며, 왜국이 동의했다는[* 왜 조정은 김동암에게 비단, 풀솜, 가죽 등을 듬뿍 주는등 상당한 환대를 보였다.] 시각이 있다. 하지만 당시 당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으며, 무엇보다 신라가 국운을 거는 사업임에 분명한, 당나라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 의사를 표명하기에는 더욱 큰 국제적 계기가 필요했다는 시각 때문에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갈의 부족 가운데 유일하게 고구려에게 완전 봉속되지 않고 동맹관계만을 이어왔던 [[흑수말갈]]은 발해기에도 부분적 봉속만 이어가며 예맥족과 같으면서도 다른 길을 걸었다. 이들은 오랜 타국의 지배와 나라 없는 설움을 겪은 끝에 [[여진족|고구려를 능가하는 만주 역사상 최강의 족속]]으로 분화, '''[[금나라|당나라의 후예들을 집어삼켜 버리기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