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김시대 (문단 편집) == 역사 ==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통령에 취임하여 집권한 시대는 90년대지만 본격적인 역사는 군사정권의 시대이던 60년대, 70년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영삼은 [[이승만 정부]]의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만 26세 5개월의 나이로 최연소 당선되면서 삼김 가운데 제일 먼저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며 통합야당 [[민주당(1955년)|민주당]]에 합류했고, [[조병옥]]을 비롯한 민주당 구파 소속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아갔다. 김대중의 정치적 대부는 [[대한민국 제2공화국]]의 유일한 총리이자 실질적인 집권자가 되는 민주당 신파의 [[장면]] 부통령이었다.[* 민주당 구파는 [[일제강점기]]와 그 이전으로 거슬러가는 구 지주 세력이 중심이 되었고, 민주당 신파는 신흥 자본가를 중심으로 했다. 김영삼의 집안이 거제의 유지 집안이었고, 김대중은 스스로 일어선 자본가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출신 배경과 정확히 일치하는 계파로 정치 경력을 쌓게 된 것이다. 민주당 구파가 상대적 보수, 민주당 신파가 상대적 진보의 입장을 취하게 된 것도 이들에게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민주당은 [[4.19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분열하여 구파의 [[신민당(1960년)|신민당]]이 딴 살림을 차렸고, 군부독재 시대가 도래하고 나서도 구파의 [[민정당]]과 신파의 [[민주당(1963년)|민주당]]은 대립했다. 이들은 [[한일기본조약]] 투쟁 국면에서 [[민중당(1965년)|민중당]]으로 합당한지 1년만에 구파가 또 [[신한당]]을 차리며 재분열했다가 다음해 [[제6대 대통령 선거|6대 대선]]을 앞두고서야 [[신민당(1967년)|신민당]]으로 재통합하게 된다. 김영삼은 이미 신구파 분당 직전부터 이른바 구파의 '23인위원회'의 일원으로 신구 갈등의 핵심 인물로 개입하고 있었다.] 김종필은 [[4.19 혁명]] 전부터 정군활동을 내세우며 정치적 입지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결국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정계에 벼락처럼 등장하게 된다. 1969년 11월, 이미 4선 의원, 원내총무였던 42세의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1970년 1월 3선 의원인 46세의 김대중이 출마하면서 삼김정치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유진산]]의 일선 후퇴([[진산 파동]])와 함께 신민당의 대선 경선은 김영삼 우세구도로 구성되었으나, 막판에 [[이철승]] [[이철승계|계파]]를 끌어들인 김대중의 역전승으로 제7대 대선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한판 승부가 된다. 박정희는 부정선거 의혹을 크게 일으키며 대선에서 승리했고, 김대중이 정권의 탄압과 납치로 주춤한 사이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되면서 양김은 정계의 전면에 부상한다. 김종필은 [[3선 개헌]] 반대로 박정희에게서 한발 멀어졌지만 [[10월 유신]]에 동조함으로써 실세 국무총리로 전면에 나섰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한 뒤 1980년 [[서울의 봄]] 시기에는 직선제 개헌을 거쳐 [[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신민당(1967년)|신민당]]의 김영삼/김대중의 격돌이 예상되었으나,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으로 [[전두환]]/[[노태우]]의 [[신군부]]가 정권을 찬탈하자 이들은 정치활동을 금지당하면서 매치는 7년 뒤로 미루어진다. [[전두환 정부]] 시대에 김영삼-김대중 "양김"은 계속 민주화 투쟁에 나섰고 결국 [[제12대 국회의원 선거|12대 총선]]의 [[신한민주당]] 돌풍과 함께 정계에 복귀한다.[* 반면 이 시기 김종필은 미국 등을 떠돌면서 정계와 아예 거리를 두었다. 군사정권과 투쟁하지 않았던 김종필이 13대 대선을 앞두고 신민주공화당 창당 및 대선 출마를 발표하면서 다 된 밥에 숟가락을 얹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제13대 대통령 선거]]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로 부활한 세 사람은[* 이 총선에서 DJ의 평화민주당이 70석을, YS의 통일민주당이 59석을, JP의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각각 획득하며 세 당 모두 125석에 그쳐 과반 확보에 실패한 여당 민주정의당을 압박하기에 충분한 의석수를 확보했다.] 각각 [[부울경|PK]], [[전라도]], [[충청남도]]의 지지를 바탕으로 [[3당합당|합종]], [[DJP연합|연횡]]했으며, 김영삼과 김대중은 [[제14대 대통령 선거]]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차례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삼김시대가 30년 넘게 지속되면서 90년대 중반부터는 삼김시대에 대한 피로감도 일부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김영삼, 김대중의 정당이나 다름 없었던 [[통일민주당]]-[[신한국당]]과 [[평화민주당]]-[[새정치국민회의]]는 물론,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자유민주연합]]은 삼김이 공천을 포함한 전권을 갖고 있었으며, 대선 후보 경선은 사실상 추대식이나 다름 없는 요식행위였다.[* 물론 합당을 거쳐야 했던 [[민주자유당]]이나 [[민주당(1991년)]] 등에서는 당내 다른 계파들과 경선을 치러야 하긴 했었다. 김영삼의 상대로는 [[박태준]] 등이 거론되었으나 상대적으로 중량이 약한 [[이종찬(1936)|이종찬]]이 나왔고, 김대중의 상대로는 [[민주당(1990년)|꼬마민주당]] 출신인 [[이기택]]이 나왔다. 두 후보 모두 60%를 넘기는 득표로 무난하게 경선에서 승리하였다.][* 삼김시대가 끝나갈 무렵(15대 총선 이후 ~ 15대 대선 이전)에는 새정치국민회의 내에서 이에 대한 비토여론 역시 없지는 않아서 서울권 중진의원인 4선 [[정대철]](당시 국회의원은 아니고 지구당위원장이었음)과 5선 [[김상현(1935)|김상현]]이 연합하여 각각 대선 경선후보와 당 총재에 도전했으나, 둘이 내분을 일으키면서 세력화가 이뤄지지 못 하고 둘 다 김대중 총재에게 패했으며 둘 다 [[동교동계]]에게 찍혀서 정권 교체 이후에도 그리 힘을 쓰지는 못 했다.] 결국 2000년대에 이르자 삼김정치는 패거리 보스정치, 권위주의의 대명사로 낙인 찍히게 된다. 김대중이 당선된 [[15대 대선]]은 역설적으로 "삼김정치"가 처음으로 청산대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했다. 이회창, 이인제, 그리고 민주당에서 불어온 "제3후보론"([[조순]] 후보론)이 대표적이었다.[* [[14대 대선]]에서도 [[정주영]]의 [[통일국민당]]이나 [[박찬종]]의 신정당이 개인정당으로서는 상당히 선전하기도 했는데, 특히 박찬종은 삼김정치 청산과 차세대 정치를 외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물론 박찬종은 민주공화당 출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더니 [[신민당(1994년)|신민당]] 창당 과정에서 벌어진 각목파동으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더니 정계에서 잊히고 만다.] 2009년 8월 18일에 김대중이, 2015년 11월 22일에 김영삼이, 2018년 6월 23일에 김종필이 차례로 숨을 거두면서 삼김은 대한민국의 현대 정치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2022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권의 거물들 상당수는 삼김에 의해 정치권에 등용되었거나 삼김에 의해 정치 인생이 바뀐 인물들이 절대다수이고, 여야중진 대부분이 삼김시대에 정치를 시작했다.[* 특히 과거 자유당이나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쪽 인사들도 삼김과 얽히거나 삼김의 영향력을 받은 사람들이 꽤 많다.]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삼김의 영향력을 물리적으로 받지 않는 정치 세대가 정치권에서 주류를 차지하려면 적어도 20년은 더 지나야 할 정도로 대한민국 정치계에서 삼김의 비중은 엄청난 것이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