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김시대 (문단 편집) == 2강 1중, 김종필의 입지 == 김종필은 [[박정희 정부]]에서 총리를 역임하고 박정희의 가장 큰 정치적 적수였던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에서도 총리를 역임했다는 진기록을 세우기는 했지만 실상 대통령을 역임한 김영삼이나 김대중에 비하면 유력한 대권후보로 부각되지는 못했다.[* 이 세 인물이 [[노태우]]와 전면적으로 경쟁한 13대 대선에서도 김종필은 4대 유력 후보 4위, 그것도 한 자리 수 득표만을 거둔 4위였고, 다음해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도 김종필의 신민주 공화당은 원내 4당이었다. 87년 대선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각 김종필의 3배가 넘는 표를 얻었다.][* 특히 87년의 13대 대선 결과가 김종필의 정치적 입지와 그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 것이 4위 김종필의 8.1% 득표를 그대로 2위 김영삼의 28.0%에 더하더라도 1위 노태우의 36.6%를 넘을 수는 없었다. 즉, 0.2%의 쩌리 5위 [[신정일]] 후보를 제외한 4강(또는 1강 2중 1약) 후보군 중에서 유일하게 단독으로는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흔히 김종필의 역할을 '캐스팅보터' 라고 설명하지만 실상은 캐스팅보터로써의 영향력에도 한계가 있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3당 합당]] 이후 양당 체제로의 재편성이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노태우(민정당)-김영삼(통민당)-김대중(평민당)의 3강 체제가 유지되었다면 김종필(공화당)은 캐스팅보터의 역할조차도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3당 합당으로 민정당과 퓨전했지만 기어코 민자당의 주도권을 확보한 김영삼이나 시민사회운동세력+학생운동세력을 영입하여 세력을 확보한 김대중이 한국 정치 양대 정파의 실질적인 창업자가 된 것에 비하면 김종필의 정치적 한계는 명확했던 것이다.] 즉, 삼김정치는 사실 김영삼/김대중의 양김정치에 김종필이 추가된 구도였다. 애초에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 대선 주자로 격돌했던 인물인데 비해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박정희 정권 말기까지만 해도 김종필의 정치적 커리어가 김영삼, 김대중 이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대권주자로 박정희와 격돌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소장파 정치인'(소위 40대 기수)으로써 기존 정치인인 박정희와 대결한 구도에 가깝기 때문이다. 당장 세대로 봐도 1910년대생인 박정희에 비해 삼김씨는 1920년대생으로 반 세대 젊다. 즉 박정희 다음 세대로써 박정희 정권의 2인자이던 김종필과 박정희 다음 세대로서 소장파 대권 도전자이던 양김씨의 경력은 비슷한 레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김종필이 김영삼/김대중에 비해 정치적으로 도태된 것은 박정희 사망 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국내에 남아 탄압을 감내하면서 저항하여 정치적 위상을 높인 양김씨에 비해 김종필은 사실상 굴복하고 미국으로 도피하면서 대중적 관심 바깥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애초에 김종필 자신도 이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알았기에 80년대 말 정계에 복귀한 뒤로는 [[3당 합당]]이든, [[DJP연합]]이든 캐스팅보터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민주화 운동가였던 DJ와 YS에 비해 유명세가 딸렸고, DJ가 가진 전라도, YS가 가진 부울경 기반에 비해 JP의 충청도 기반 위력은 작은 편이었다. 이 점에서, 김종필의 충청(충남) 지역색 자체가 호남의 김대중, 영남(PK)의 김영삼이라는 지역 구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도 있다. 게다가 DJP 연합이 [[2000 남북정상회담|1차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일시 붕괴되면서 충청도의 제1정당은 민주당계 정당이 되었으며, 한때 충청지역은 물론, 수도권 일부와 강원일대에서도 선전했던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은 군소당 수준으로 사라지게 된다.[* DJP 연합이 무너진 직후 [[이인제]]를 중심으로 했던 [[새천년민주당]]이 [[제16대 국회의원 선거|16대 총선]]에서 자민련의 원내교섭단체를 무너트렸으며, 17대 총선에서도 여당 [[열린우리당]]이 16대 대선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을 바탕으로 충청도 전역을 석권했다. 행정수도 이슈가 희미해진 노무현 정권 후반부터 충청권의 한나라당의 지지세가 크게 증가하였지만, [[제17대 대통령 선거|17대 대선]]으로 집권한 이명박 정권의 행정수도 폐기 기조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도로 충남은 [[국민중심당]]-[[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에게, 충북은 민주당의 영역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 총선]]과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대 총선]]에서 정계 전체가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양당구도로 이인제가 이끄는 자민련의 마지막 후신인 선진통일당은 새누리당에 흡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 정국에서 김종필의 세력은 "(신민주)공화계"로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김종필의 민주공화당 세력은 신군부의 탄압으로 몰락한 80년대조차 [[관제야당]]의 형태인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으로 남아있었기에 김종필은 이들과 정치활동규제에서 해금된 측근들을 규합하여 87년 정국에서 자신의 세력을 복구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삼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의 당내 소계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당내 숙청이 시작되자 역시 자유민주연합으로 뛰쳐나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15대 총선에서 "녹색돌풍"을 일으키며 제3세력으로 입지를 다시 굳혀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 비록 김종필의 위력이 양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대세를 파악하는 안목과 더불어 자신의 한계를 알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두 번이나 부활하여 할거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