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위일체론 (문단 편집) == 이해와 묘사 == 이하 내용의 대부분은, 이해하기 위해서 실체와 효능인의 개념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관점과 위격에 대한 교부 철학, [[스콜라 철학]]의 입장에 대한 사전 지식이 필요하다. 동시에 이 본문에도 정통 삼위일체론과 다른 내용이 중간중간에 적혀있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본질에 대하여 성자 종속론이나 양태론 등의 거짓된 탈출구를 만들어내서 탈출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br][br]다시 말해서 알 수 없는 것(분명히 한 분이신데 셋이시다)을 알 수 없는 것 그대로 결론을 낸 것인데, 이런 삼위일체론이 오히려 지식에 대한 탐욕으로 변질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볼 수 있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리스도 신앙」 요약해서 삼위일체론은 알 수 없는 신의 본질을 다른 무언가로 포장해서 결론내지 않고, '''알 수 없음'''이라는 상태 그대로 결론을 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말해서 삼위일체론은 부정신학[* 하느님의 본질이 아닌 것을 부정하여 남은 것만을 인정하는 형태. 삼위일체론도 아리우스주의나 성부수난설 등의 이단설을 부정해 결론을 내린 형태이다.]의 산물인데 '''원래 삼위일체론은 신학분야 중에서도 신의 본질에 대하여 다루는 신론에 속하고, 신론은 [[정교회]]는 물론이고 서방교회에서도 주로 부정신학적으로 다룬다.''' 당장에 서방교회의 스콜라시대의 대가인 아퀴나스도 다른 부분은 긍정신학으로 다루다가 신론에서는 부정신학으로 다룬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 정통 교리로 가지고 있는 신관(神觀).[*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 신(神)론에 있어서는 서로 동일하다. 사실 가톨릭이든, 정교회이든,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이든, [[네스토리우스파]]의 후계인 [[아시리아 동방교회]]이든간에 초기 교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종파들은 모두 삼위일체의 기본 개념, 곧 한 하느님 실체의 세 페르소나는 공유한다. 이들의 차이는 그리스도론의 구체적인 해석에서 나왔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양태론이나 역동적 군주신론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둘 다 정통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단적 사상이라고 본다.] 같은 아브라함계 신을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인 [[이슬람]], [[유대교]]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점. 이슬람과 유대교에서는 이 교리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다신교적 요소를 받아들였다고 비판하기도 하며 일종의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기독교에서는 유대교를 이슬람교보다 가깝게 보지만 유대교 측에서는 삼위일체의 존재 때문에 이슬람이 오히려 교리적으로 더 가깝다고 보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하느님 또는 하느님의 아들이 아닌 어디까지나 인간인 [[예언자]]로서 존경하고 있고, 심지어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 이전에 존재한 [[메시아]]임도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언자라는 입장이다. 성령은 [[천사]]나 하느님의 권능으로 보고 있으므로 삼위일체론을 부정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공의회에서 주교들과 교부들이 "성자와 성부는 동일한 실체다"(Homoousion on Patri)라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삼위일체론의 기본 개념이 정리되었다. 다만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 자체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는 예수와 성부의 동질성을 말하는 구절도, 구분을 말하는 구절도 모두 발견된다. 여기서 양 극단의 해석(아리우스파와 단일신론)을 쳐내고 나온 것이 니케아 공의회의 합의이다.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물]], [[얼음]], [[수증기]]가 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은 똑같은 H,,2,,O라는 설명이 자주 쓰인다. 그러나 이 표현은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만약 '겉모습'에 주목하여 버려서, 성부와 성자는 곧 같은 존재인데 하나의 본체가 서로 겉모습만 달리 나타났을 뿐이라고 이해한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가 초월자가 다른 모습을 취해서 나타나는 [[화신]]([[아바타]])이라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성부수난설, 혹은 양태론이라고 불리는, 초대교회 시절부터 있었던 이단적 주장이다. 이 비유가 문제가 있는 이유를 좀 더 직관적으로 설명하자면 H,,2,,O라는 '''분자 하나'''가 물, 얼음, 수중기 세 형태로 '''동시에''' 존재하지 못한단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삼중점]]에서는 물질이 고체, 액체, 기체로 공존하지만, '''분자 하나'''는 삼중점에서도 고체이거나 액체이거나 기체 상태이다. 세 위격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겉모습을 바꿔가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간혹 [[양자역학]]의 입자 파동 [[이중성]]으로 설명하려고도 하는데, 입자와 파동도 한 순간에는 한 형태로만 존재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직접적인 비유는 힘들지만 [[블랙홀]]의 [[특이점]] 정도나 되어야 삼위일체론과 비교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블랙홀의 특이점은 [[부피]]는 0이지만 [[질량]]은 존재하며, [[존재]]는 인정하지만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며, [[공간]]에 위치하지만 [[특수 상대성 이론|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페르소나(위격)라는 용어의 이해에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원래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삼위일체에 사용한 용어이지만, 삼위일체론에서 활용된 이후에도 독자적으로 고유하게 발전하여 그리스도교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가 페르소나 단어를 복수형으로 사용할 때, 이 단어의 현대적 의미로 말미암아 거의 필연적으로 복수적인 정신 행위의 중심, 정신적 주체성과 자유를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하느님 안에는 이러한 세 가지 중심은 있지 않다. 하느님 안에 단 하나의 본성이 있고 단 하나의 절대적 자기존재가 있으며 아버지의 자기표현은 단 하나 로고스(이는 말하는 이가 아니라 말해진 이다)가 있고,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에는 (두 가지 행위를 전제하는) '''상호''' 사랑이 없고, 아버지의 사랑하며 구별을 설정하는 자기수용이 있다. 라너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의 페르소나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각 위격은 자기의식을 소유하지만 이는 하느님의 본성을 매개하여 주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각 위격의 자기의식은 위격들 서로를 구분 짓지 않으며, 하느님 안에 세 가지 '주체성'은 없다. 만약 세 가지 주체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삼신론의 위험에 떨어진다. 때문에 라너는 페르소나 개념을 보충하기 위해, 구별되는 '자립실체방식'(distinkte Subsistenzweise)을 보조 개념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하였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신학에서의 “인격”은 심리학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성격(character)”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학에서는 ‘전인격[* 지성, 감성, 이성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삼위일체에서의 위격은 인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말은 삼위일체의 위격은 세 하느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느님의 상대적인 상호관계라는 말이 된다. 사실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어려운 개념이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논리체계에서는 아예 성립하지 않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성부도 하느님이고 성자도 하느님이며 성령도 하느님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부=성자=성령이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논리체계인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삼위일체는 그냥 '''믿음'''이지 인간이 확인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삼위일체는 신앙의 신비로 불리는 것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리 쉽지 않은 게, 예수가 곧 성부라고 해도 이단이고, 예수는 성부와 별개라고 해도 이단이다. 정확하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신적 본질은 같되 위격은 다르다'라는 의미다. 좀 더 복잡한 교부시대 표현을 빌리면 성부가 성자를 낳았고, 성부에게서 성령이 발현한다.[* 서방교회에 따르면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현한다.] 그러나 세 위격은 모두 태초부터 존재하였으며 선후 관계는 없다. 이 논리가 골 때리는 것은 대충 이런 구조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하느님은 한 분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아야 된다고 말하면 이해하기가 쉬운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은 분이 아니라고 하니까 논리가 꼬인다. 하지만 믿음의 영역을 떠나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쉽게 되지 않는 까닭에, 이러한 삼위일체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묻는 시도가 중세 철학계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이것이 곧 보편논쟁이 된다. 이 보편논쟁에서 가장 큰 두 축이 되었던 의견은, 삼위가 실재한다고 보는 실재론과, 이름만이 있을 뿐이라는 유명론이었고, 각각 [[안셀무스|성 안셀모]]와 [[오컴의 윌리엄]]이 해당 사상을 대변했다. 삼위일체는 애초에 성경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서방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이른바 [[요한의 콤마]]로 삼위일체에 대해 성서적 근거를 부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요한의 콤마는 동방교회 쪽 그리스어 필사본에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서방교회의 라틴어 필사본에만 나타났다. 이 구절은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는 것이 문헌비평학적으로는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삼위일체는 성경에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교가 발생한 곳은 다신교의 세상이었으며, 거기서는 많은 신들에 대한 믿음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한 종교 시장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다른 신들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는 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들에게 맡겨진 과제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하느님이 어떤 신인가, 그리고 그 하느님이 구약성서에서 분명하게 밝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과는 어떤 관계인가라는 물음과 씨름해야만 했다. || [[파일:external/www.therealpresence.org/holy_trinity-1.jpg|width=100%]] ||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1757785776_81b5cdebed.jpg|width=100%]][* 세 머리를 한 예수(three-headed Jesus)로 알려져있는데, 통상적인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정통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에서 자주 사용하는 상징이다. 이는 세 위격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라는 점을 강조한다.] || || [[파일:external/solzemli.files.wordpress.com/icon_of_the_holy_trinity.jpg|width=100%]] || [[파일:external/fullhomelydivinity.org/becket%20arms.jpg|width=100%]] ||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16새기 [[이콘]] 목판 템페라. 이 이콘은 '성 삼위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아브라함이 세 사람(또는 천사)을 대접한 창세기 18장 일화를 삼위일체의 예표로서 이해하고 그린 것이다. 그림을 보면 성자가 두 손가락을 뻗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신성과 인성을 의미한다. 또, 성자의 눈이 맨 왼쪽의 인물을 향하고 있으므로 맨 왼쪽의 인물이 성부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오른쪽에 앉아 있는 인물은 성령인데, 바라보는 시선과 가운데의 잔에 주목하자. 먼저, 잔에 담겨 있는 것은 양고기로, 성도의 희생을 의미한다. 또한, 성령은 성부, 성자, 성령이 둘러 앉아있는 테이블을 바라본다. 사실 이 테이블은 제단이며, 순교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즉, 성령은 신자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을 성부, 성자, 성령의 성 삼위일체 가운데에 위치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 3마리 [[까마귀]]의 도상 || 삼위일체는 유럽의 화가들에게 매우 독특한 회화적 도전을 선사했는데, 그 중에는 똑같은 생긴 인물을 세 명 그려놓고 성부, 성자, 성령이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아가 '''[[케르베로스|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3개인]]''' 삼위일체를 그린 화가들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무시무시한 그림들은 당대에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실제로 신비를 표현하려다 보니깐 신학적으로 엄밀하지 않다는 문제점도 있다. 전통적으로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일화에서, 초월자가 스스로를 복수로 지칭하는 것을 삼위일체에 대한 단서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만 창세기를 근거로 삼는 건 오늘날 신학에서 부정적인데, 천지창조 일화에서 초월자가 복수형으로 지칭된 것은, 많은 고대 언어가 많음과 위대함, 혹은 존경, 거대함 등을 명확하게 구분짓지 않고 복수형으로 쓰던 언어 습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를 장엄복수형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라는 말에서 '우리'는 의미상으로는 '나'의 강조로 보는 것이 더 알맞다. [* 이같이 복수형 표현으로 단수형을 높이는 표현은 현대 언어에서도 나타난다. 교황들도 공식 석상에서 자신을 '우리'라고 지칭했다. 또한, 유럽의 여러 언어들에서 [[T-V구분]]이라 하여 2인칭에는 지금도 남아있는데,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는 '당신'이라는 경어로써 너(ты)의 복수형인 너희(вы)를 쓴다. 영어가 2인칭 단수와 복수가 같은 것도 2인칭 복수였던 you를 높임말로 쓰다가 예삿말로까지 확장된 것이다. 원래 단수였던 thou는 [[두에-랭스 성경]]이나 [[킹 제임스 성경]] 같은 옛 문체를 쓰는 영어 성서에서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성서비평학이 발달한 이후의 신학에서는, 창세기보다는 복음서에서 삼위일체 설명을 도출하는 것을 선호한다. 사실 애초에 교부 시대부터 삼위일체는 복음서에 기반을 두었고 창세기는 곁가지이긴 했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