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팔선 (문단 편집) == 문제점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38th_sign.jpg|width=100%]]}}}|| || ''' 38선 팻말''' ||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경계선으로 대충 만들어진 까닭에 너무나 인위적인 분계선이었다. 같은 분단국인 월남(베트남)도 [[휴전선(베트남)|북위 17도선]]으로 분단되었지만, 실제로는 북위 17도선보다 약간 남쪽인 강을 경계로 분단된 것이었고 남북으로 긴 영토 특성상 길이도 짧았다. 북위 38도선은 지형이나 행정경계, 교통로 등과 전혀 연관이 없으므로 아래와 같은 문제점이 발생한다. * '''고립된 지역 발생''' 예를 들어 황해도 서남단의 [[옹진군(황해도)|옹진]]반도는 남한 땅이지만 옹진반도에서 개성 쪽으로 향하는 유일한 육상로인 [[해주시|해주]]는 북한 땅이라서 육로 교통이 차단된 [[월경지]]가 되었다. 또 38선 이북에 위치한 해주의 경우 [[해주항]]이 위치한 용당포 일부 지역이 38선 이남에 있어서 해주항 일부가 월경지가 될 판국이었다. 때문에 해주의 경우 용당포를 포함한 해주 전체를 소련이 관할하고 38선 이남의 해주만은 미국이 관할하는 것으로 미군정과 소군정이 합의를 해서 월경지가 생기는 건 피했으나 해주항과 [[서해]]를 연결하는 해주만이 막혀버리는 바람에 6.25 이전까지 해주는 이름처럼 바다와 접하고 있는데 정작 바다를 쓰지는 못하는 무늬만 항구도시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 점을 이용해서 해주시 자체가 북한 주민들의 주요 탈북 루트가 되기도 했다. 항구를 경비 중인 경비대만 따돌려서 배만 띄우면 바다가 미군정 관할이라 경비대가 잡을 겨를이 없었다.] * '''강제 분리되는 행정구역''' 삼팔선은 자연지물 (하천, 산, 호수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나가기 때문에 하나의 [[면(행정구역)|면]](面)이나 [[리(행정구역)|리]](里)가 삼팔선에 의해 분리되어 미국과 소련의 군정 당국 간에 마을의 관할권을 두고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쪽에 귀속될지를 놓고 주민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충돌이 발생하는 일도 많았다. 이것만 해도 큰일인데 행정구역이 나누어지는 것도 불균등하게 나누어지므로 사태가 더 커졌다. 당장 [[개성시]]의 경우 시가지는 한국령인데 바로 윗산인 [[송악산]]은 북한령이다.[* 정확하게는 38선이 송악산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남쪽 사면을 지났다. [[육탄10용사]]도 이러한 지리적 요인과 관련이 있다.] 또한 필수적으로 같이 운용해야 하는 시설이 양분된다. 황해도 [[연백군]]과 [[옹진군(황해도)|옹진군]]에서는 농토는 남쪽에, [[저수지]]는 북쪽에 있어서 농사를 지을 때마다 농사용 물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 '''방어상의 문제점''' 이는 특히 남한 측이 심했는데 북한의 경우에는 삼팔선 인근에 고지대를 형성한 곳이 많아서[* 위에서 언급한 송악산이나 옹진반도 전체를 내려다보는 감제고지인 국사봉 등등.] 쉽게 방어진지 가설이 가능했지만 남한의 경우에는 북한의 고지가 쉽게 관측할 수 있는 산비탈이나 평지에 방어선을 만들어야 하니 유사시 방어에 엄청난 차이가 난다. 덤으로 앞서 언급한 옹진, 연백, 개성 지역은 조금만 밀려도 바로 바다나 강이 나오기 때문에 자연적인 [[배수진]]이라서 유사시 일단 포기하는 지역으로 선정되고[* 그래서 전쟁 이전에 개성박물관의 [[고려청자]] 문화재 등 옮길 수 있는 건 미리 남쪽으로 피난시켰다. 유사시 개성을 방어하기 힘들다는 건 전쟁 이전부터 예상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지역들은 [[6.25 전쟁]]이 끝난 후 결국 북한이 차지하게 된다. 이런 이유와 함께 북한은 이미 [[김일성]]이 주도해서 남침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민군]]의 장비와 숫자를 크게 늘렸다. 반면에 남한의 경우에는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승만 정부]] 때 [[신성모]] 국방장관이 '''[[300(영화)|전쟁이 벌어지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등 대책없는 강경 연설로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군사원조를 받아내는 근거로 활용됐으나 근거 없는 북진 연설 등에 기겁을 한 미국은 오히려 남한에 원래 약속한 장비와 물자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중장비는 거의 없었으므로 [[한국군|국군]]의 수와 질이 모두 떨어진다는 것도 작용했으므로 삼팔선 자체는 엄중한 경계가 펼쳐지지 않았다. 즉 38선에는 주요 도로에만 검문소 비슷한 경계진지를 만들어놓고 삼팔선을 지키는 주력병력은 약간 후퇴한 전술적 요지에 주진지를 만들어서 경비했다는 것이다. 덤으로 조선인민군은 따로 삼팔선 경비부대를 창설할 정도로 병력[* 다만 인구수는 남한의 절반도 안 된 마당에 농사나 공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대거 군대로 보내버리는 무리를 해서 소련 측에서도 감축을 하라며 우려를 표했을 정도다.]과 장비가 풍부해서 일단 38선 북쪽에 주진지가 없는 곳이 거의 없었던 데 반해 한국군은 앞서 말한 대로 병력과 장비가 모자라기 때문에 방어가 불능하다고 생각되는 지역은 경찰이 담당하거나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그래서 개전 초반에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