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평통보 (문단 편집) === 상평통보의 유통과 우여곡절 === 상평통보가 본격적으로 제조 유통되기 시작된 때는 [[숙종(조선)|숙종]] 4년(1678) 1월 23일로, [[허적]]이 새 화폐 제조와 유통을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주조되었다. 이 때의 통용책은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세심해져서, 동전을 쌀 · 무명 · 은화와 연결시키고 세금 일부의 납부와 녹봉의 일부 지급에 동전을 이용하여 사회 심리적으로 동전의 안정성을 보증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동전의 확산에는 일본의 은 수출 제한도 영향을 미쳤다. 1681년까지 [[대만]]의 [[정씨 왕조]]에 대해 해금령을 실시하고 해안의 거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기는 등 완전한 해상 봉쇄 정책을 폈던 [[청나라]]가 대만 세력을 몰아붙이고 해금을 해제하면서, 일본으로 쇄도하는 중국 상선이 늘어났다. 이에 일본에서는 1685년 내항하는 중국 상선의 머릿수를 제한하여 은 유출을 줄였고, 1695년에는 은화를 은 함량 80%의 게이쵸 은에서 은 함량 64%의 겐로쿠 은으로 전환하였다. 조선은 이에 대해서 [[인삼]]을 무기 삼아 인삼에 한해서 80% 은을 계속 뜯어낼 수 있었지만, 이전의 중국산 생사 · 비단 무역은 타격을 받아 은의 유입량이 줄어들었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한편으로 은을 구리로 대체하려 노력하였고, 이에 1710년대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은보다 구리의 공급이 원활해졌다. 이에 힘입어 조선에서는 상평통보를 유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평통보의 초기 유통에서 조선 정부는 또다시 화폐 운용의 미숙으로 인한 여러 곤란을 겪어야 했다. 1695년부터 1697년까지 [[을병대기근]]으로 인해 구휼을 위한 재정이 긴박해지자 정부는 지나치게 화폐 주조를 통한 이익에 집착하였고, 그 결과는 [[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각 관에서 마음대로 찍는 데다 사주조도 활발하여 동전의 질도 들쭉날쭉했다. >어영청에서 10삭(朔)에 한하여 주전(鑄錢)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이 때에 흉년들어 재물이 궁핍하니, 호조 및 각 군문(軍門)이 날로 주전하여 재용을 늘리는 길로 삼고, 민생이 이로 인하여 더욱 곤궁하여짐을 생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를 근심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112010_005|숙종 21년(1695) 12월 10일자 기사]]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희무가 상주하기를, >“전폐(錢幣)는 곧 나라 안에서 통용되는 화폐입니다. 전화(錢貨)는 크고 작음이 각각 그 제도가 있는데, 근래에 점점 잡스럽고 뒤섞여 당초의 모양과 비교하여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는 단지 관에서 주조한 것도 처음과 같이 못할 뿐 아니라, [[위폐|반드시 민간에서 몰래 주조]]하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엄중히 금지 단속하면 거의 값이 떨어지는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며, 또 법을 범하는 것을 막는 방법도 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해청(該廳)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였다. 당시 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사주(私鑄)가 매우 많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잡스럽고 뒤섞임이 날로 더 심해지고 가치가 더욱 떨어졌으므로, 이희무가 마침내 엄금하기를 청한 것이다. >---- >[[http://sillok.history.go.kr/id/ksa_12405006_002|숙종 24년(1698) 5월 6일자 기사]] 이 결과 동전의 폐단에 대한 상소가 잇달아, 1698년부터 동전의 주조가 중단되었다. 문제는 그것이 '''1731년까지, 33년 동안'''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이 결과 동전의 가치가 계속 상승하고 1710년대부터는 동전이 부의 축적 도구로 이용되면서 시장에서 돈이 마르는 [[전황]](錢荒)이 발생하였다. 몇십 년 사이에 화폐 가치가 들쭉날쭉한 상황을 겪으면서 화폐의 신인도는 하락하였고, 성호 [[이익(실학자)|이익]] 등은 아예 동전을 폐지해 버리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730년대부터는 동전의 주조가 재개되어 전황에는 다소 숨통이 트였으나, 1820년대까지 전황 국면은 계속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1710년대부터 일본이 구리의 수출도 제한하기 시작하면서 구리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구리에 아연 등을 섞어 원가 절감을 노렸으나 이 결과 동전이 쉽게 부스러져 시장 내 유통 기한이 짧아졌고 돈이 줄어들었다. 또한 시장의 규모가 확산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물류 유통이 팽창했던 것도 작용했다. 그러나 18세기 토지 매매, 임금 지불 등의 문기에서 거래는 대부분 동전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상평통보가 제법 보편화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 [[동남아시아]] 구리, [[스웨덴]] 구리 등의 유입으로 동아시아 내에서 구리의 공급이 활발해지면서 구리 가격이 내렸고 [[전황]]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1829년부터 1832년까지 152만 냥을 찍어 유통시키는 등 1809년부터 1857년까지 600만 냥이 보급되어 완전히 정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