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평통보 (문단 편집) === 일제강점기의 상평통보 === 비록 상평통보의 주조는 1894년에 중단되었지만 특히 북부에 비해 근대 인프라가 지지부진했던 경상권과 호남권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상평통보가 꾸준히 통용되었다. 상평통보의 유통을 중단시키고 발행한 백동화는 실제 금속 가치에 비해 상당히 액면가가 높은 악화였다. 여러 이유가 있는데 백동화 주조 기술을 제공해준 일본에서 제조된 사주전(위조 동전)이 마구 유통된 것도 있고, 화폐 발행권을 중앙은행이 아니라 조정의 유력자들이 쥔 탓에 이들이 마구잡이로 악화를 발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앙 정부의 화폐 정책을 불신하는 풍조는 계속되었다. 백동화 발행 당시 조선 정부는 상평통보 200전을 신 화폐 1냥으로 교환해주었고[* 이때부터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같은 '반푼'이라는 표현이 돌기 시작했는데, 이전까지는 반푼이라는 단위가 없었다.] 지속적으로 상평통보를 없애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혁은 서울과 수도권을 벗어난 지방에서는 여전히 상평통보로 거래하는 풍조가 잔존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기존의 발행한 구 한국 은행권 주화들은 1925년 말까지 일제가 발행한 조선 은행권과 병행해서 쓰이다가 유통이 중단되었는데, 이때 상평통보는 여전히 보조화폐로 쓰였고, [[1925년]] 말 구 한국 화폐의 유통 중지령에도 상평통보는 제외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만 이 당시 상평통보는 보조화폐 용도가 강했다. 일단 당일전이든, 당이전이든, 당오전이든, 당백전이든 가리지 않고 한 푼으로 쳤으며[* 1902년에 미국 의사 필하와(...)(Eva Field의 음차)와 한국인 신해영이 서술한 <산술신편>에 "당오전은 한 푼이 곧 닷 푼이므로, 엽전의 다섯 배가 되어서 한 푼을 닷 푼이라고 이르렀으나, 지금은 법률로 당오전 한 푼을 엽전과 같이 마련하니라."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이런 풍조는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10푼이 모여서 1돈이 되고, 10돈이 모여 1냥이 되고, 구한국 시절에 엽전 닷냥을 1원으로 바꿔서 계산했으므로 일제 시대에 상평통보는 닷냥(=500개)이 조선 은행권 1원(당시 [[조선 엔|조센 엔]])으로 통용되었다. 즉 상평통보 닷푼이 조선 은행권 1전(당시 조센 센)과 동등한 가치로 통용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풍조는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에서는 해방 직전까지도 통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오래된 시골집에선 먼지 뒤집어쓰고 굴러다니는 상평통보가 발견되곤 하며 금속탐지기 들고 산에 올라 땅 파보면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한국인]]을 가리켜 [[엽전]]이라고 비하하는 표현도 이 시절 끝까지 엽전만을 고집하던 조선인들을 두고 만들어진 표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