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새천년민주당 (문단 편집)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16대 총선에서 석패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총재를 맡고[* 이 당시엔 대통령이 총재를 맡는 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 겸 여당 총재가 공천에도 직접 관여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더 심화시켰다는 평이 많다. 이후 2001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이후 총재 자리를 없애버리면서 이 풍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민신당 세력의 이만섭과 이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를 몰아주었으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일찍 터지면서 되려 정략적이란 반응으로 야당(=보수 한나라당) 표가 결집한 것. 선거 출구조사만 해도 민주당은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봉화군|봉화]]-[[울진군|울진]] 선거구에서 김중권 후보[* 본래 [[민주정의당]] 출신이었지만 민주당계 정당으로 합류한 인사이다.]가 19표 차로 낙선하는 등 접전이 벌어진 선거구 11곳 가운데 10곳에서 패하며 115석에 그쳐, 133석의 한나라당에게 제1당을 내줬다. 한나라당은 이로서 여당의 과반을 저지하고 오히려 원내 과반수에서 4석 모자란 거대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회창의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하게 굳혔다. 따지고보면 경상북도 지역에서 당선인을 낼 뻔 했기도 했고 그 동안 보수 텃밭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강원도 의석 9석 중 5석을 획득하였으며 그때까지 민주당계 정당의 불모지였던 충청권에서 8석을 얻는 등 선전하며 전국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는 첫발을 떼었지만, [[자유민주연합]]과의 선거 공조 무산으로 수도권에서만 한나라당에게 20석을 내준것이 패인이었다. 만약 자유민주연합과 선거연대가 성사되었다면, 새천년민주당은 과반에 근접하고, 자민련은 교섭단체를 꾸릴 수 있었다.[* 충청은 자유민주연합이, 나머지는 새천년민주당이 담당함을 가정한 단순 득표율 합산. 다만 1998년 지방선거에서 당선인을 낼뻔했다가 선거 공조 무산으로 한나라당에게 당선인을 내준 곳임을 감안해야 하기는 한다.] 계속되는 선거 패배, 더 나아가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해진다. 그리고 [[동교동계]]를 번갈아 선임한 [[서영훈]] - [[김중권]] - [[한광옥]]의 임명직 대표 체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 [[김대중]]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은 2001년 11월 8일부로 여당 총재직을 사퇴했으며, [[동교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나서, 이른바 양갑 - 즉 한화갑과 권노갑의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권노갑]]을 위시로 한 동교동계는 [[이인제]]를 대권으로 밀었으나, 한화갑은 이른바 국민참여경선을 통해서 [[천신정]]으로 대표되는 소장파들과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자 하였다. 물론 권노갑은 한화갑에 비해 전면에 나서지 못했는데, 정치사건으로 감옥에 가면서 원외, 당외의 2선으로 밀러났던 탓이 컸다.[* 대선 경선 초기 레이스에서 [[김근태]]가 권노갑에게 정치자금 받은 것을 고백하면서 권노갑의 세가 약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권노갑이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고 해서 이인제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 이 때만 해도 이인제는 부동의 여권 차기 대권주자라는 정치 거물로, 이인제가 [[피닉제]]라고 평가받게 된 것은 훨씬 후인 2008년의 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