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광계 (문단 편집) == 생애 == 군사/문화/종교/서양학 모두에서 활약한 다재다능한 인물로 [[16세기]] 말~[[17세기]] 초 당대 명나라의 엘리트 중에선 거의 먼치킨급이었던 [[이지조]] 및 양정균과 콤비를 이루었다. [[1600년]] [[마테오 리치]]로부터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여 천문학 등 각종 서적을 번역했다. 《기하원본》, 《측량법의》, 《측량이동》, 《구고의》 등을 번역하고 역법을 배웠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중국 별자리 체계에 남반구 별자리 23개를 새로 추가하기도 했다. 또한, geometry를 지허(機何)로 음차해 '기하'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서광계였다.] 천주교 사상을 통해 중국 유학을 보충하고, 불교를 바꿀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상을 전개해나갔다. [[1616년]] [[남경교안]] 당시 이를 막기 위해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나 결국 교안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기를 시키고 천주교의 맥을 잇는 데는 성공하게 된다. 또한 [[홍이포]]의 위력을 알아본 후, [[네덜란드]]로부터 홍이포를 수입할 것을 강력하게 건의했다. 서광계는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의 인맥을 이용하여 [[마카오]]를 통해 30문의 홍이포를 수입했다. 그 중 11문은 천하의 요충지인 [[산해관]]에 설치했고, 나머지는 수도인 [[북경]]성에 설치했다. [[원숭환]]은 이후 [[영원성 전투]]에서 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후금의 대군을 박살냈다. 앞서 [[1619년]]에 일어난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은 작전 미스, 기후 불안 등의 2중 3중의 악재가 겹쳐 철저히 참패했다. 이를 계기로 서광계는 국방 체계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희종 [[천계제]]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환관 [[위충현]]이 까는 바람에 관직을 집어치웠다. 그런데 영원성에서 단 11문의 홍이포가 맹활약하며 승리하자 홍이포의 위력이 명과 후금 전체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숭정제]]가 즉위하고 나서 명나라는 홍이포의 대량 생산에 들어갔는데 서광계가 그 담당자를 맡았다. 이렇게 아담 샬의 도움을 받아 서광계가 첫 해에만 찍어낸 홍이포의 숫자가 '''무려 400문이었다.'''[* 비슷한 시기 지방 정부에서도 홍이포를 생산했는데 양광총독부에서만 무려 500문을 생산했다고 한다.] 서광계는 2차로 150문을 더 제작하여 성에 배치하고, 함선에도 배치했다. 그 외에도 상하이에 각종 복지 시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광계는 이렇게 화포를 만들고, 복지 시설을 건립하다가 [[1633년]]에 7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당시 명나라는 1627년에 바로 이자성의 난(초기 시점)이 시작되었고 이 당시 기후적인 문제로 기근과 흉작이 계속 지속되었고 이것은 전 중국으로 휩쓴다. 또한 명청전쟁으로 급증한 군사비 재원을 충당하기위해 3향과 같은 부가세들을 더욱 걷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만다. 또 후금은 내몽골을 통해 우회하여 중국 북부지역에 주기적으로 침공해서 엄청난 약탈을 감행했었다. 서광계가 선종할 당시 망국의 조짐들이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터지고 있을 때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