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동요 (문단 편집) === 밝혀졌다? ===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왕의 비 중 신라의 왕족 여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등장했다''' 라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익산지역 [[쌍릉]]의 발굴 결과, 무왕과 같이 묻힌 왕비가 무왕보다 먼저 죽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 경우 사택 왕후의 경우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왕보다 늦게 죽었으므로 사택적덕의 딸이 아닌 무왕의 첫째 비가 존재했을 것이다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관련기사 [[http://news.donga.com/3/07/20150403/70505214/1| 1]], [[http://www.factoll.com/page/news_view.php?Num=908| 2]]. 이는 무왕의 다른 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기 때문에 이걸로는 서동요의 주인공이 무왕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못 된다. 선화공주가 익산 성주의 딸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역시 선화공주는 신라왕의 딸일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대체자를 선택한 것이었다. 2016년 [[쌍릉]] 출토 유물 재조사 결과 '''20대-40대 사이 여인의 유골'''과 '''신라제 토기'''가 나오는 바람에 신라 공주까진 아니어도 신라 왕족 여인이 이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다. [[https://news.v.daum.net/v/20160126205605099 |기사]] 그러나 이 이주헌의 논리는 학계의 많은 질타를 받고 있다. 치아 분석은 마모흔 분석에 의한 것이여서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보고자 스스로가 그 자인하고 있으며, [[쌍릉]]은 정식 발굴된 무덤이 아니라서 고고학적 정황도 충분하지 못하다. 고고학도들이라면 학부때 배우겠지만, 치아 감식을 포함한 모든 자연과학적 분석 기법은 고고학적 정황에 기반하지 못하면 고고학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더군다나 [[쌍릉]]은 추가장이 가능한 횡혈식석실분 구조이며, 일제 발굴 후 거의 100년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주헌이 그 근거로 제안한 대왕릉 출토 연질토기는 신라토기라 볼 수 없다. 이주헌이 발표한 세미나에서 토론자 최완규를 비롯하여 많은 학자들이 그 사실을 지적하였다. 정리하자면 선화공주라는 증거는 여전히 없으며, 앞으로 검증해나가야 할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정황상 [[쌍릉]]은 백제 사비기 분묘인 능산리형 무덤 중에서도 후기 형식이면서도 그 규모가 가장 크기 때문에 무왕릉으로 볼 수 밖에 없으며, 소왕릉은 왕후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능묘의 입지가 산 정상부로 바뀌고, 봉분의 규모가 커진 것도 당시 당나라 황제릉인 헌릉과 소릉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미륵사 출토 사리외호와 사리내호는 배경을 원문 정으로 눌러서 원문으로 가득 채우는 어자문 기법이 돋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배경을 성글게 채운 형식으로 수말, 당초에 해다한다. 또 대왕릉 출토 옥 대장식구는 역시 당식 대금구가 정립하기 이전 양식으로 수나라말 당나라 초기의 형식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무왕의 수많은 수나라, 당나라 교섭기사 등에서도 당나라와 백제 무왕의 관계를 알 수 있다. 결국 대왕릉 추가발굴에서 [[무왕(백제)|60대 성인 남성]]의 유골이 발견됨에 따라 이주헌이 제기한 학설은 사실상 입론의 여지를 잃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