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산회의 (문단 편집) == 외부의 대응 == 처음 광저우는 일부 불만을 가진 위원들의 우발적 행동이란 정도의 인식만 가지고 이들에 대해서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았다. 맨 처음 린썬이 장가구에서 사중전회를 소집하겠다고 알려오자 광저우 중앙은 중전회는 국민정부가 소재한 광저우에서만 소집할 수 있다는 결의사항을 재확인하는 수준의 대응만 했으며 린썬과 쩌우루에게 경비를 지급하란 명령을 재정부에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2차 대회에서도 린썬은 위원으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쑨원의 영전에서 사중전회를 소집한다는 통전을 받고 나서 사태가 심상치않음을 안 광저우 중앙은 정치회의를 소집하여 대응을 논의했다. 광저우 중앙은 중전회를 광저우에서만 열 수 있다는 결의를 다시금 확인하고 이를 베이징집행부에 전달하여 서산회의 소집을 막으려 했으나 11월 23일 예정대로 서산회의는 소집되었다. 이에 왕징웨이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감찰위원들을 모아 연석회의를 연 다음에 서산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나머지 15명의 중집위원의 이름을 빌려 서산회의 소집을 비난하는 한편, 이것이 불법회의임을 강조했다. 마오쩌둥이 이 통전의 초안을 작성했다. 마오쩌둥은 연아용공이 쑨원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 직접 채택한 정책이자 일전대회의 공개절차를 거친 당의 기본입장이라면서 서산회의의 반공주의를 비판했고 사중전회의 베이징 소집의 불법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나 마오쩌둥의 논리를 보면 삼중전회가 광저우에서 개최되었으니까 사중전회도 당연히 광저우에서 개최해야한다는 논리라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왕징웨이는 12월 8일 민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서산회의에 참석한 중집위원이 정족수미달이므로 서산회의가 불법이란 논리를 전개했다. 그리고 정치보고에서 서산회의를 다시금 비난했다. 다만 미묘한 논조 변화가 있었는데 기존에는 서산회의 참석자 전원에 대해서 반혁명분자, 배신자로 비판하던 논조가 '주동자'로 지목된 쩌우루 한사람만을 공격하기 시작하고 나머지는 그에게 속았을 뿐이며 당의 원로라고 일부 고평가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국민당 조직부장 담평산이 서산회의는 처음엔 심각한 문제였으나 이젠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쩌우루 한사람만 문제고 나머지는 그저 속아서 이름을 빌려준 사람들일 뿐이라고 서산회의의 의의를 폄하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쩌우루 한사람만을 추궁하고 다른 사람들에겐 '참가하게 된 경위가 다르다'는 이유로 '억울한 처분'을 당해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나섰고 이것이 이전대회에 그대로 보고되기로 결정되면서 광저우 중앙의 공식입장이 되었다. 이는 서산회의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여 그들을 각개격파하려는 전략이었다. 그외에 광저우 중앙과 공산당은 서산회의의 주장에 대해 핵심은 피하면서 회의가 불법이라는 둥의 지엽적인 문제를 물고 늘어졌고 서산회의는 이를 반박했다. 한편 광저우 중앙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1926년 1월 1일 이전대회 소집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전대회는 그동안 세번이나 날짜가 바뀌는 등 준비가 매우 지지부진하였는데 서산회의에 대응하기 위해 모든 준비작업이 1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