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산회의 (문단 편집) === 다른 인물들의 반응 === * [[후한민]]의 경우, 우리나라엔 장제스나 왕징웨이에 묻혀 거의 아는 사람이 없으나 국민당 우파의 상징적 인물로 일찍이 사중전회 소집으로 공산당을 억제하자고 주장했던 인물이며 왕징웨이와 더불어 쑨원의 후계자로 거론되던 오랜 혁명동지였다. 만약 그가 서산회의에 찬동한다면 광저우 중앙의 입장에선 타격이 컸고 이에 베이징집행부 집행위원 이대조가 모스크바의 후한민에게 전보를 보내 린썬 등의 반공활동을 포기하게 해달라고 종용했다. 후한민은 이대조에게 직접적인 화답을 하진 않았으나 11월 25일 왕징웨이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이 서산회의에 찬성하지 않음을 밝혔다. 그리고 12월 중순에 모든 중전회가 광저우에 개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는 후한민이 반공적인 입장은 여전했으나 서산회의의 분파주의적 행보에는 찬동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쉬충즈는 당시 상하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서산회의에 참석하진 않았으나 서산회의 참가자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줌으로 서산회의에 대한 옹호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이때문에 상하이 당중앙의 독자적 이전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비록 쉬충즈는 참여는 거부했으나 반공을 위해 계속 서산회의파와 회동을 같이 함으로 일반적으로 서산회의파로 분류된다. * [[쑨커]]의 경우, 중집위원은 아니었으나 쑨원의 아들이란 점에서 영향력이 강했고 태자파로 불리는 계파까지 이끌 정도의 인물이어서 서산회의파는 그를 포섭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쑨커도 국민정부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서산회의파와 제휴, 홍콩에서 1만원을 마련하여 경비로 지원해주었다. 이에 광저우 중앙도 쑨커를 회유하려 했고 쑨커는 광저우로 돌아가게 된다. 광저우 중앙은 쑨커를 이전대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했고 쑨커는 서산회의파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이는 서산회의파가 반왕징웨이의 대안으로 자신이 아니라 장제스에 기대를 거는 것에 쑨커가 불만을 가졌기 때문으로 보이며 쑨커와 서산회의파의 단절은 서산회의파에 큰 타격을 준 것으로 분석된다. * 장제스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할 기회가 없었으나 황푸군관학교 특별당부는 12월 18일 서산회의 소집에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장제스도 12월 25일 서산회의가 국민정부의 대의를 방해한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왕징웨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더라도 장제스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던 서산회의파는 군권을 가진 장제스가 광저우 내부에서 서산회의에 내응해주길 기대했으나 장제스가 공개적으로 자신들을 비판하고 나서자 배신감에 장제스의 주장에 조목조목 맞섰으나 이후에도 장제스를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를 묵살했다. 허나 장제스는 이후 이전대회에서 공산당의 지나친 성장을 우려하여 서산회의파에 대한 온건론을 주장했다. * [[허샹닝]]은 서산회의의 소집을 크게 비판했다. 해당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