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서 (문단 편집) === [[위(삼국시대)|위나라]]에서 === 조조에게 투항한 뒤 서서는 팽성상(《수경주(水經注)》 권23)을 거쳐 황초 연간(220~226년)에 우중랑장을 거치고 어사중승 같은 주로 감찰관 직을 맡았다. 여기서 우중랑장은 황제를 모시는 일을 담당하는 광록훈 휘하에 있는 비2000석 관직이고, 어사중승은 관리와 백성들을 감찰하는 직책이다. 상당히 높은 고위직으로 삼공의 일원이자 최고 감찰관인 어사대부 바로 밑의 관직으로 꽤나 높은 직위에 오른 것이다. 서서는 어사중승에 오르기까지 이름을 서복으로 하다가 서서로 개명했다고 여겨진다. 즉, 개명을 여러 번 하지 않았을 가정하에 유비 수하 시절의 이름은 줄창 서복이었다. 여기서 우중랑장, 어사중승은 겸직이 아니라, 역임한 순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기록을 살펴보면 "至黃初中,韜仕歷郡守、典農校尉,福至右中郎將、御史中丞。"이라 하여 석도는 군수와 전농교위를 역임했다고 하며, 서복(서서)는 우중랑장, 어사중승에 이르렀다 한다. 이것은 우중랑장 어사중승을 겸임한 것이 아니라 우중랑장을 거쳐 어사중승에 이르렀다고 봄이 타당하다. '至' 이후 역임한 관직을 나열하는 것은 일반적인 기록형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홍이손의 《삼국직관표》에서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으로 홍이손은 우중랑장 항목에 역임한 이에 서복(서서)을 둠으로써 서서가 우중랑장과 어사중승을 각각 역임했음을 밝히고 있다. 〈동화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후에 승상이 되어서, 아랫사람들에게 가르치며 말하였다. "진실로 서원직(서서)의 십분의 일과 동유재([[동화(삼국지)|동화]])의 힘써 부지런함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라에 충성함은 물론이요, 나도 가히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당신들이 서서의 1/10 정도만 해줘도 내가 편하겠다.'는 뜻이다. 또 제갈량은 "모름지기 관리들은 많은 사람들의 지혜를 한데 모으고 유익한 충언을 널리 받아들여야 한다. 서로 작은 의견 충돌조차 피하려고 하여 자유로운 토론을 거리낀다며 나라의 손해가 클 것이다. 토론을 통해 서로를 뜻을 공유하면 이는 마치 해진 짚신을 버리고 구슬과 옥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란 참으로 어려우니 이러하기가 쉽지 않은데 오직 서원직만이 이렇게 처신하면서 미혹되지 아니했다." 라고 말했다. 제갈량의 발언으로 미루어보건대 서서는 여러 사람들과 의견을 자유로이 교류하면서 좋은 방안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걸로 보인다.[* 실제로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끼리 토론을 하면 충돌하다가 서로 감정만 상하기 십상인데, 서서는 그런 분쟁의 여지를 잘 중재하며 합의을 도출하는 능력이 탁월했던듯 하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해 결국은 나라에 이로움을 가져다주었으니 제갈량은 그만큼 서서를 진심으로 높이 평가한 것이다. 나중에 제갈량이 북벌하고 있던 태화 연간(227~232년)에 공명의 학우였던 서서, 맹건, 석도 등이 위나라에서 맡고 있던 직책을 알게 되자[* 석도는 태수와 전농교위(典農校尉)를 역임하였다. 맹건은 정동장군(征東將軍) · 양주 자사(凉州 刺史)에 임명되었다. --본인이 예언한 대로 태수나 자사 했잖아--] 그가 말하기를, "위(魏)에는 선비가 너무 많구나! 어찌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쓰인단 말인가?"하고 탄식하였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면 서서의 직책이 그렇게 낮은 지위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명이 입에서 저런 말이 나왔으니 서서는 상당한 능력의 소유자였을 듯하다.[* 그러나 이런 시각도 있다. 어사중승이 말이 좋아 관리감찰직이지, 실상 현대에서도 감찰이란 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을뿐더러 출신만 영천이지, 진짜 성골들인 진씨, 순씨등에 끼기는커녕 단가 출신이고, 그마저도 범죄 경력에 적 진영 출신에 온갖 안 좋은 딱지가 붙어있는 서서가 가진 어사중승이라는 직책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의 발언/감찰권이 있었을까 하는 시각이다. 즉, 위나라에서 작정하고 서서를 허수아비 고위직책에 덩그러니 세워 놓은 거 아니냐는 것. 제갈량이 한탄한 것도 그런 위나라의 어사중승이라는게 실제론 별거 아니라는 상황을 통찰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만 이는 순수한 추측일 뿐이며, 서서가 어사중승을 지낸 시기가 황초(조비)~태화(조예) 연간이었는데, 그 '''[[사마의]]'''도 조비 시절에 어사중승이었다. 즉 진짜로 이 벼슬 자체가 허울 뿐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실 제갈량이 서서를 얼마나 높이 평했는지를 감안하면 어사중승이 중책이라도 본인 입장에서는 낮다고 여길 만하다. 제갈량은 한 국가의 전권을 가진 승상이었는데, 자신이 높이 평사한 친구가 '위나라의 중신 중 하나'에 그쳤다면 자신 입장으론 충분히 기대 이하의 직책이다. 여기선 어사중승 자체가 별게 아닌 벼슬이라고 보는 것보단, 오히려 항복한 다른 세력 출신이고, 이미 중신들이 자리를 잡은 이후에 합류한 후발주자인데다가 연줄도 없는데 능력만으로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간 서서가 그만큼 출중한 인재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제갈량의 저 발언은 1)인재가 많다고 위를 띄워주고 싶었다 2) 저런 중책조차 서서의 능력에 비하면 낮다고 서서를 띄워주고 싶었다, 둘 중 하나일텐데 일반적으로는 적국을 띄워주는 멘트였다기보단 본인 친구를 띄워주기 위한 멘트란게 더 그럴듯 하다.] 서서는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병으로 죽었는데 정확한 몰년은 알려지지 않았다. 서서가 정사에서도 지략가였는지는 알 수 없다. 개인 열전이 없고 사적은 촉서 제갈량전의 주석을 통해서만 간략하게 전해지는데,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 미비하기 때문에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기 힘든 것이다. 서서가 맡은 직책이나 제갈량의 말로 미루어볼 때 적어도 행정 능력은 뛰어났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시대의 명재상 제갈량이 높이 평가하기도 했고, [[개천에서 용 난다|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건달 노릇이나 하면서 심지어 남을 대신해서 사람을 해치기까지 하던 밑바닥 인생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국가의 고위직에까지 오른]] 서서의 재능이나 노력은 결코 함부로 깎아내릴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조비가 건국한 위나라는 [[문벌귀족|가문과 집안의 힘이 무척이나 중시된 국가]]였는데도 서서는 오직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그런 제약을 이겨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서는 한 시대의 인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제갈량처럼 뛰어난 행정수완을 바탕으로 다양한 일을 맡아 볼 수 있는 인물로, 인재영입이 치열했던 전국시대였다면 재상도 맡아 볼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연의에서 지략가로서 보여준 면모는 서서가 공명의 친구답게 다재다능한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지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