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특별시/역사 (문단 편집) ==== 1980년 이후 ==== 1980년 관악구에서 '''[[동작구]]'''를 분리하고, 이와 동시에 방배동과 동작동 일부(현 반포본동)를 강남구로 이관했다.[* 실제로 이 일대는 강남구로 넘어간 후에도 1998년 학군 조정때 까지는 [[8학군]]이 아닌 9학군에 속했었다.] 이때 사당동 중 남부순환로 이남 지역은 관악구에 잔류하여 남현동이 되었다. 그리고 영등포구에서 '''[[구로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이 때 신도림동 중 도림천 동쪽 지역은 영등포구에 잔류하여 대림동이 되었다.(17구) 1984년까지만 해도 서울 강남 지역은 군사적 의미에서는 온전히 '서울'은 아니었는데,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방사) 위수지역이 서울 강북 지역뿐이었고, 강남 지역은 경기도(전방 6군단 지역 제외)[* [[1.21사태]] 때 [[제6군관구사령관]] [[김재규]] 소장이 서부전선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탈탈 털린 것도 이와 관련.]와 인천을 관할하던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 위수지역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1984년에 수도경비사령부가 [[수도방위사령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위수지역이 서울시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988년 1월 1일 강서구에서 '''[[양천구]]''', 강남구에서 '''[[서초구]]''', 도봉구에서 '''[[노원구]]''', 동대문구에서 '''[[중랑구]]''', 강동구에서 '''[[송파구]]'''가 분리되었다(22구).[* 이 때 도봉동과 창동은 [[노원구]]로 --[[도봉구]]에 도봉동이 없다니--, 도곡동은 [[서초구]]로 보냈으나, 1년 만에(1989년) 각각 도봉구와 [[강남구]]로 환원되었다.][* 1980년대 주택가가 형성되었던 목동 지역의 대문들에는 '''서울특별시 강서구 목동'''이라는 패찰이 붙어 있는 곳이 2015년 현재, 아직도 많다. 그 패찰들은 모두 80년대부터 붙여진 아주 오랜 유물인 것. 이 패찰은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에서 1978년에 제정되어 1988년까지 제작되었으며 초기에는 우편번호(OOO-OO형식의 5자리) 표기 없이 주소만 표기되었으나 1983년부터는 우편번호도 같이 표기하였다. 그 외에도 공릉동 지역의 대문들에도 목동과 마찬가지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공릉동'''이라는 패찰이 있는 집도 있다.] 1988년에는 서울 인구가 1000만명을 돌파했고, 1992년에는 1090여만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였다. '''1988년~1992년에는 사실상 세계 인구 최다 도시였다.''' 왜냐하면 현재 서울보다 인구가 많은 인도의 [[델리]], [[뭄바이]]와 파키스탄의 [[카라치]], [[라호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러시아의 [[모스크바]], 브라질의 [[상파울루]]는 당시에는 인구가 1000만 명이 되지 않았고, 당시 서울보다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 경계 내 인구가 더 많았던 도시는 일본의 도쿄와 중국의 상하이, 베이징 3개 도시밖에 없었는데, 세 도시 모두 한국의 서울, 인천, 경기도 등 수도권 전체를 한 도시로 지정하는 수준으로 도시지역이 아닌 지역까지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로 지정했기 때문에 국제적 기준으로는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 전체가 도시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거 [[도쿄시]]에서 확장된 [[도쿄도]]의 전체 인구는 서울보다 많지만 구 도쿄시 지역인 [[도쿄도 구부]]의 인구는 1000만 명 미만으로 서울보다 적고, 베이징, 상하이는 당시 도시권 전체를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로 지정했음에도 인구가 1100만~1300만 명 수준에 불과했고, 도시 지역은 인구가 서울보다 적었다.[* 현재는 도시 지역도 서울보다 인구가 많다.] 현재 행정구역상 단일 도시 인구 세계 1위는 인구 3000만 명의 중국 [[충칭시]]이지만, 충칭의 경우 어지간한 성(省)급으로 면적이 넓으며 남한 전체 면적의 80% 수준이다. 도심 지역 인구로만 따지면 700만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단일 도시''' 기준으로, 사실상 모든 광역권을 쌈싸먹는 중국의 도시이기에 가능한 것. 베이징의 면적은 서울의 27배, 상하이의 면적은 서울의 10배다. 애초 중국은 광역권 그 자체를 그냥 한 도시로 쌈빡하게 묶어버리고 각개의 시를 구로 묶어서 중국인들은 한국인처럼 행정구역에 따른 칼 같은 구분 없이 그냥 다 무시하고 생활권으로 한 도시인지 따진다. 참고로 세계 최대 인구 광역권은 [[도쿄]]이다. 베이징, 상하이, 충칭 등 중국의 대도시는 한국의 서울, 인천, 경기도 등 수도권 전체를 한 도시로 지정하는 수준으로 도시지역이 아닌 지역까지 단일 도시로 지정하는 일이 많아 국제적 기준으로는 전체가 도시라고 할 수는 없다. 인구 밀도가 대도시급인 1평방킬로미터당 3000명 이상이 거주하는 구만 계산한다면 현재 상하이는 2100평방킬로미터에 1500만 명이 거주하고, 베이징은 1400평방킬로미터에 1300만 명이 거주한다. 1995년 성동구, 도봉구, 구로구에서 [[동일로]], 우이천, [[남부순환로]]를 경계로 하여 각각 [[광진구]], [[강북구]], [[금천구]]가 신설되고, '''[[광명시]] 철산동 일부가 금천구에 편입된 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확장은 없었다.''' 이 때, 성수동 중 [[동일로]] 동부 지역은 노유동이 되었고, 가리봉동 중 [[남부순환로]] 이남 지역은 금천구 가산동이 되었다. 이 중 노유동은 이후 2008년 8월 자양동에 흡수되었다. 1992년 1097만까지 증가한 인구는 [[1기 신도시]]의 분양으로 경기도와 인천으로 인구가 분산되고 서울 자체의 출산율도 떨어짐에 따라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2000년대 중반 [[뉴타운]] 건설로 다시 인구가 증가할 때도 있었지만 2010년대 중반부터 다시 감소세로 돌아서서 2023년 기준으로 940만까지 줄었다. (물론 여전히 많지만) 관할 구의 개수는 여전히 25개다. ||'''1995년 3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경계조정 차원)'''|| || 자잘한 경계조정차원에서 소규모의 추가 편입이 이루어진 것. 참고로 지금도 일부 지도는 1995년 경계 조정 이전의 경계를 쓰는 경우가 간혹 보인다. *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 일부''' (현 서울시 금천구 가산동 일부) : 지금의 한진택배 물류센터, 국민일보 인쇄공장 등 철산교 서울방향 인근. 구로쪽에 유수지 일부와 당시에는 정비소나 공장이었던 지금의 롯데물류센터 자리는 서울에 편입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면 [[안양천]] 쪽은 경계조정이라기 보다는 철산3동 [[월경지]]가 서울시에 편입된 것에 가깝다. * 경기도 광명시 하안동, 소하동 일부 (현 서울시 금천구 독산동, 시흥동 일부) : 안양천 둔치내부의 구불한 경계를 조정한 것. 다만 그 문제의 독산동(12단지옆 근린공원, 안천중, 안천초, 독산한신 등)은 서울로 계속 남게되었다. * 경기도 광명시 광명동 일부 (현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 천왕동 일부) : 1973년 목감천쪽 경계조정 당시에 정리되지 못한 일부 경계를 조정한 것. 너무나 자잘하게 꼬여서 그런지 1995년 경계 조정때는 안양천쪽과 다르게 주민들의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 경기도 고양시 지축동 일부 (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 일부) : 이쪽은 안양천변, 목감변 주변과 달리 1:1 교환이다. ||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2642#0000|1995년 경계구역 조정 법률 원문]] 그러나 광명시 쪽 경계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안양천]], [[행정구역 개편/수도권/서울개편론/광명시 서울 편입]] 항목 참조. 1995년 행정구역 대개편을 앞두고 서울특별시 분할안이 검토된 적이 있었다. 서울특별시를 서울시(강북), 영등포시, 강남시 이런 식으로 쪼개자는 것. 물론 서울쪽의 반발이 뻔히 나왔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서울 분할은 없다"고 일축하는 바람에 이 떡밥이 쏙 들어가버렸다. 노무현 정부때 이와 비슷한 떡밥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당시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 떡밥 및 현재까지 이루어지는 서울시 행정구역 개편 문제에 대해서는 '''[[행정구역 개편/수도권/서울개편론|서울특별시/행정구역 개편 문제]]''' 참조. 2008년에는 몇몇 법정동이 통합되었다. 노유동, 포이동, 모진동 등이 이때 사라졌다. 그리고 2015년 12월 7일, [[위례신도시]]와 관련한 행정구역 경계 조정이 [[http://www.law.go.kr/법령/서울특별시송파구와경기도성남시,하남시의관할구역변경에관한규정/(26665,20151126)|실시되었다]]. 이로써, 1995년 안양천변 경계조정 이후 20년만에 서울시 경계가 소폭 변경되었다. [[http://www.goodtms.net/news/articleView.html?idxno=8644|관련기사]] ||'''2015년 12월 7일 서울특별시 행정 편입지역 (경계조정 차원)'''|| || 자잘한 경계조정 차원에서 서울특별시 송파구 거여동과 장지동의 각 일부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복정동 , 하남시 학암동 각 일부와의 1:1 교환 형식으로 소규모의 추가 편입이 이루어진 것.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복정동 일부 *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일부 || 하지만 이미 문제가 해결된 위례신도시쪽([[위례신도시]]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위례신도시는 이곳에 있던 여러 군부대(일명 남성대)를 이전하고 남은 땅에 만든 신도시이다. 그러기 때문에 개발될 때까지 오랫동안 아무런 논의가 없었던 것.)을 제외한 몇몇 서울시계 지역에서 아직도 경계 문제를 둘러싼 지자체간 갈등은 진행 중. 1992년의 절정을 끝으로, 1993년부터 서울 인구가 점차 줄어들더니 2003년에 경기도 인구에 역전당했고, 2016년 5월에 1000만명의 선이 28년만에 깨졌다. 2008년에는 일부 법정동의 통폐합(포이동, 노유동 등)이 이루어졌고, 광명시와의 도시계획구역 경계조정(행정구역 경계와 일치화) 역시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 [[관동 대지진]]으로 일본의 수도 [[도쿄]]가 폐허가 되자 수도 천도 논의가 있었는데, 그 중엔 서울 혹은 용인 모현읍 외대캠퍼스 부지 일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지진 이후로도 수도 천도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진 적도 있었으며, 일제의 본토 사찰단이 서울 및 용인이 일제의 수도로 적합한지 여러가지 시찰을 행한 적도 있었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식민지에 수도를 둔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만약 이 상태로 광복이 되었다면...[* 다만 경성이나 용인이 [[도쿄 대공습|케이죠우핫]] 꼴을 당하는 그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애초에 미국은 ‘식민지’인 조선을 일본 본토와 철저히 구분하여 실제 역사에서도 일부 소규모 폭격을 제외하고는 큰 공격이 없었고,설사 경성에 천황이 눌러앉았다 해도 [[히로히토]]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던 미국이기에…] 항공사진의 변천을 보고 싶다면 [[http://gis.seoul.go.kr|여기]]로 들어가면 된다. 허나 인천시와 다르게 서울시는 전산시스템의 문제 때문인지 항공사진 조회 절차가 복잡하다(...). 1972년(정확히는 1971년 말부터)부터 지금까지 찍은 사진들을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