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청원 (문단 편집) === [[상도동계]]의 대표주자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청원-2.jpg|width=100%]]}}} || || '''{{{#fff △ 서청원 의원}}}''' ||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모교 중앙대학교와 [[김영삼]] 대통령의 자택이 있는 지역이다.]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조종호]]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한민주당]] [[박실]] 후보[* 이 분은 [[한국일보]] 기자 출신이었다. 다만 서청원이 어용 야당 소리를 듣던 민주한국당에 몸 담았던 것과 달리 신한민주당 창당 과정에서부터 함께한 인물이었다.]와 민주정의당 [[허청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박실]]은 [[평화민주당]]으로 출마했고, [[동작구 을]]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참고로 이 선거에서 [[김부겸]]도 [[한겨레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었다.] 같은 해 [[통일민주당]] 대변인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1989년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실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3당 합당]] 때에 상도동계의 영수였던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입당했다. 이 때부터 보수 정치인으로서 쭉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3년 1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국무위원#s-4|제1 정무장관]]을 겸임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96년 5월부터 1997년 3월까지 신한국당 원내총무([[국회운영위원장]] 겸임)를 맡았고, 이후에는 당내 민주계 모임인 '정치발전협의회'의 간사장을 맡으면서 [[이회창]] 대표와 갈등을 빚었다. 이후 대선후보 경선에서 민주계 후보 4자연대를 구성하며 반 昌 흐름을 유도했다. 1998년 2월에 전임자인 김태호의 사임에 따라 공석이 된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1998년 8월에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총재 경선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했다. 이후에도 당 총재인 이회창에 반대하는 중진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고, 이런 행보로 인해 차기 총선에서 공천을 못 받을 것이라는 설이 돌았고 [[서석재]]나 [[국민신당(대한민국)|국민신당]] 인사들 처럼 [[새천년민주당]]으로 옮길 것이라는 예측도 많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공천을 무사히 받으며[* 당시 중진들 상당수가 공천에서 탈락한 점을 생각하면 의외였다는 평이 많았다.]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편 1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출투표에서 새천년민주당 [[이만섭]] 의원(당시 8선, 전 국회의장)에게 단 8표 차이로 패하면서 의장이 되지 못했다. 당시 그는 5선이었으니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영원히 없었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의 관계 개선을 막후에서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5월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총재 단일지도체제에서 다수의 최고위원을 선발하고 그 중에서 득표율 1위가 대표가 되는 집단지도체제가 출범했는데 그 처음이 된 것. 물론 한나라당은 일찌감치 대선후보로 [[이회창]] 전 총재를 선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회창 대선후보가 당 내에서 1인자 역할이었고, 서 대표는 사실상 2인자라는 분석이 있었다. 이후 제3회 지방선거와 이어진 200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까지 승리를 거두었으며, 아예 대선을 앞두고 후단협 출신 의원들과 자민련 출신 의원들까지 영입하면서 세력을 불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선은 새천년민주당 후보인 노무현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이후 [[이회창]]이 대선에서 패배하자 대선 재검표를 주장했으나, 어찌 되었던 노무현의 승리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아서 결국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2003년 1월에 대표직을 사퇴했다. 이후 2003년 2월부터 다음 전당대회 이전까지 [[박희태]] 최고위원이 당 대표 권한대행을 맡았고, 이후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 대표에 출마했으나, 결국 [[최병렬]] 의원에게 당 대표 경선에서 2위로 패배했다. 이후 당내 중진으로서 민정계 출신인 [[최병렬]] 대표와 대립했다. 하지만 대선자금 문제로 서 전 대표가 구치소에 들어가자 최병렬 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석방동의안을 가결시켜[* 당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연합해서 석방 동의안을 가결시켰는데 이 때문에 방탄국회 논란이 있었다.] 다시 국회로 돌아오는 일이 벌어졌고, 이는 결국 한나라당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후 [[17대 총선]]에서 원 지역구 출마를 다시 선언했으나, 끝내 1달 만인 3월 5일에 [[한나라당]] 탈당을 선언하고 총선에도 나오지 않았다. 특히 당 대표 재직시절에 발생한 불법 대선자금 수사 문제[* 그 와중에도 서청원 대표가 자신의 사위에게 한화그룹에서 받은 정치자금 10억원을 빼돌려서 사위에게 줬다는 의혹이 있었다.]로 인해 불출마한 것. 그를 대신하여 그의 측근이었던 [[서장은]]이 대신 총선에 출마했지만 결국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온 [[전병헌]]이 당선되면서 지역구가 민주당계 정당으로 아예 넘어가버렸다.[* 이 시기부터 [[박근혜]]와 인연을 맺었는데, 박근혜는 이후 서청원의 교도소 면회를 종종 갔고,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을 때에 직접 찾아가기도 하는 등 공을 들였다.] 이후 2004년 8월, 대선자금 재판 결과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추징금 12억원을 선고 받았다. 이후 항소를 선언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2006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 복귄이 이뤄졌다.[[https://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148479.html|#]][* 다만 추징금의 사면은 이뤄지지 않아 12억원 중에서 6억원만 납부를 했는데 이 때문에 상도동 아파트가 경매에 넘어갈 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