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주명 (문단 편집) === 일화 === 학창 시절 공부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점심 시간에도 [[땅콩]]을 먹고 걸어다니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이는 [[교사]]가 되고 나서도 연구에 열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두부도 좋아했었는데 이유는 먹는데 시간을 아낄 수 있어서(...). 또한 이런 일화를 반영했는지 [[웅진출판사]]의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석주명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이 생선이란다. 그 이유가 가시를 발라낼 시간이 없어서라고(...). 실화가 아니라 창작이니 유의.]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의 오류를 바로 잡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를 이룬 터라 생전에 학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다. 게다가 신분이 일반 [[교사]]라 주변에서는 '기껏 교사 주제에 잘난 척은...' 이러면서 냉소를 보냈지만, 어느 날 [[도쿄]]에서 온 고생물학자가 그를 찾아 온 뒤로는 주변의 평이 확 달라졌다고 한다. 일설로는 도쿄에서 다른 곳으로 가던 외국인 교수였는데, 길을 헷갈린 김에 학자로서 관광을 나왔다가 석주명이 연구하던 개성의 연구소를 소개받아서 구경하고 싶다고 했다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석주명 본인은 누추하고 그렇게 전문기구 없이 누추한 나비연구소라고 생각해 소개했는데, 그 교수는 참으로 과학적이고 이렇게 전문적으로 나비를 연구하는 곳은 처음 봤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웅진출판사]]의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좀 더 살이 붙었는데 운전사가 경성(오늘날의 [[서울]])으로 가려던 걸 개성으로 헷갈려서 개성에 도착했고, 나비의 보존 및 전시 방법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외국 학자들과의 표본 교환은 물론 연구비 지원까지 약속했다.] 지독한 [[일 중독]]자였다. 학교에서는 연구실과 교실 사이의 왕복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학교 측에 요청해 자신이 맡은 학급을 연구실이 있던 박물관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집에서도 방문한 손님을 10분 이상 만나지 않았고, 연구에 방해되지 않도록 서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서재와 안방을 연결하는 벨을 달아 볼일이 있으면 그걸로 부인을 불렀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다 보니 부인이 벨 호출을 정말 싫어하였고 부부관계가 크게 벌어졌다는 것. 게다가 부인이 아파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도 간호는커녕 [[나비]] 채집을 하러 가버렸다고 하니 남편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일제강점기 말에 부인과는 이혼했다고 한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나비 표본을 확보한 비결은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때 200마리나 되는 나비 채집 숙제를 내는 것. 이것이 초딩 곤충채집 여름방학 숙제의 시초가 됐다고 한다. 석주명이야 온갖 지방에서 사는 학생들 덕분에 채집여행을 다닐 수고는 굉장히 줄였겠지만 학생들은 곤충 채집한다고 고생해서 이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현재는 곤충채집 숙제가 폐지되었다.] >"'''긴지부전나비''' — 학명(學名)과 일본명(日本名)에 일치(一致)시켜서 긴지를 땄다. 긴지는 岡島銀次氏의 이름이요 필자(筆者)가 씨(氏)에게 헌(獻)하여 명명(命名)했던 것이다. 씨(氏)는 필자(筆者)의 은사(恩師)이고 일본 곤충학회(日本昆蟲學會) 회장(會長)이었었다." >---- >- 석주명 저, 『조선(朝鮮) 나비이름의 유래기』, 서울, 백양당, 1947, p.9. 석주명의 저서 『조선 나비이름의 유래기』에 따르면 [[부전나비과]] 중 '긴지 부전나비'[* 지금은 깊은산부전나비로 정정되었다.]가 있는데, 이 나비는 자신의 두 번째 스승이었던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교수를 존경하는 뜻에서 지었다고 한다. 석주명이 조선의 나비를 연구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을 정도로 교육자로서 인품이 훌륭하였다. 계몽사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석주명(계몽사)과 사계절에서 사계절 아동문고로 펴낸 석주명 위인전에 의하면, 여름방학에 오카지마 긴지 교수는 대만에 곤충채집 여행을 갔다. 비오는 날 제자들에게 다 좋으니 곤충을 채집하고 오라고 하자 다른 학생들은 다 못 잡았는데 석주명만이 하루살이들을 잡아왔다고 한다. 비를 피해 나무 그늘에 날아온 하루살이들을 삼각지(삼각형 기름종이)에 일일이 담아서 보여주자 오카지마 교수는 감명받아 끈기 있는 석주명 학생을 눈여겨 보았다. 학업을 마치는 4학년이 되자 석주명을 집에 초대하여 "다른 사람의 손이 닿기 전에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나비 연구에 착수해야만 하네. 10년만 필사적으로 해보게."라고 조언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훗날 석주명이 학자로 성공하여 [[조선산 나비총목록]]을 완성했을 때 석주명의 모교인 가고시마 농림 고등학교의 명예교수로서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 약초를 재배, 생산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0년대에 건립된 시설이다.](현 서귀포시 영천동 소재 [[제주대학교]] 아열대농업생명과학연구소)의 연구소장을 맡았다. 이 시기에 제주도 곳곳을 답사하며 나비뿐만 아니라 자연, 방언, 인문 분야를 아우르는 학문적 연구로 제주도 방언집 등 제주도 총서 6권을 남겨 제주학 연구의 기초를 세웠다.[*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생물학]]과 [[문화인류학]], [[민속학]] 및 [[비교언어학]]이 [[박물학]]에서 갈라져나온 지가 얼마 안됐던 시점이라서, [[생물학자]]가 생물학 연구를 하다말고 현지의 언어나 문화, 풍속에 대해 연구하는 일이 잦았다. [[찰스 다윈]]과 함께 현대 [[진화생물학|진화론]]의 근간을 세운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도 생물학 연구를 위해 [[남아메리카]]를 탐험했을 때, [[아메리카 원주민|현지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례도 있다. 생물학이 박물학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슈뢰딩거 방정식]]으로 유명한) '''[[물리학자]]'''인 [[에르빈 슈뢰딩거]]가 저서인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물리학]]적 관점에서 생물학을 재정립한 뒤의 일이었다.] 현재 서귀포시는 옛 생약연구소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만약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되면 옛 연구소를 석주명기념관으로 조성하여 리모델링 및 석주명선생 관련 유물자료 수집과 그의 업적을 기념하는 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한다. 2023년 5월 4일 시점에서는 2006년부터 추진했지만 아직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며 건립추진위원회가 학계의 여러 인물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기도 했다. [[https://www.seogwipo.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728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