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거군주제 (문단 편집) == 역사 == 가장 오래된 선거군주제는 [[고대 로마]]의 [[로마 왕국|왕정 시대]]에 나타났다고 하는데, [[로마 국왕]] 7명 가운데 [[안쿠스 마르키우스|2]][[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명]]이 선거로 뽑힌 왕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마 왕정에 대한 기록은 [[로마 신화|신화적인 요소]]가 많고 사실적인 기록이 별로 없으며, 무엇보다도 당대에 쓰인 기록이 [[로마 약탈|외부의 침공]] 및 [[로마 내전|내전]]으로 인해 남아 있지 않아서 실제로 선거군주제였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기록이 남아 있는 선거군주제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있다. [[카를 5세]] 이후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점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 증조부이자 2대 전 황제인 [[프리드리히 3세(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 이후로 이미 독점 상태였고, 그 뒤로도 선거권을 가진 [[선제후]]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뿌리고 이권을 양보하는 등 황위를 세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제후들의 동의가 없으면 세습이 불가능했으며 카를 5세의 자식인 펠리페 2세가 아닌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즉위한적이 있고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 선제후]]가 [[카를 7세]]로 즉위한 적도 있었다. 사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만 있는게 아니라 이웃나라 [[프랑스 왕국]]도 초기에는 선거군주제로 시작하였다. [[루이 5세]]의 죽음으로 인해 [[서프랑크 왕국]]의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자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가 프랑스의 초대 국왕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선거군주제를 종식시키고 세습군주제를 확립하기 위해 이슬람 세력 등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 갑자기 왕위가 비면 위험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의 아들 [[로베르 2세]]를 [[공치제|공동 왕]]으로 선출하게 했다. 그래서 이때를 시작으로 프랑스 왕국은 [[카페 왕조]]가 계속 [[적장자]]로 대를 이으며 [[정통성]]을 강화하면서 국왕 선거는 [[사문화|형식적인 절차로 전락했고]], 나중에는 아예 폐지되어 세습군주제가 정착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또한 선거군주제였고[* 이 쪽은 아예 대외적 비공식 국가 명칭으로 귀족 공화정(Rzeczpospolita Szlachecka)이란 이름을 자처했으며, 국왕은 선출직이며 [[왕권]]은 귀족의회에서 정한 헨리크 조항과 [[리베룸 베토]]에 따라 제한됐다.], [[덴마크]] 역시 [[1660년]]까지 선거군주제였으나 이후 [[절대왕정]]으로 전환했다. 중세 [[루마니아]]의 [[왈라키아 공국]] 및 [[몰다비아 공국]]도 선거군주제였다. [[이슬람 제국]]의 [[칼리파]]도 [[무함마드]] [[정통 칼리파 시대|사후부터 4대 칼리파]]까지는 선출제로 뽑았지만 [[우마이야 왕조]]가 들어서면서 반대파를 제압하고 세습제로 전환되었다. [[한국사]]의 사례로는 [[신라]]의 전신인 [[서라벌]] 촌장이 선거로 선출된 직위라는 사례가 있으며 당장 [[박혁거세]]부터 [[https://www.idaegu.com/newsView/idg202108160008|육촌부장들의 만장일치로 즉위]]한 군주였다. 아직 [[국가]]가 되기 이전이었으나 한국사 최초로 [[지도자]]를 선거로 뽑은 사례로서는 의의가 있다. 이외 [[고구려]]도 처음에는 다섯 부족의 우두머리들 중에서 통치자를 선출하였다. [[오세아니아]]에서는 [[하와이 왕국]]의 카메하메하 5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여 [[카메하메하|카메하메하 왕조]]가 단절되자, 선거군주제가 도입되어 [[릴리우오칼라니|마지막 여왕]]이 [[미군]]에 의해 폐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