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통제 (문단 편집) == 개인사 == 푸이는 ([[청나라 소조정]]까지 포함해서)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서 [[안경]]을 쓴 청나라 황제였다.[* 대한민국의 경우 [[정조대왕]]이 공식 석상에서 먼저 안경을 썼고, 일본의 경우 [[히로히토]]가 공식 석상에서 먼저 안경을 썼다.] 처음에는 황실의 웃어른들이 반대했지만 푸이의 [[근시]]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결국 받아들였다고 한다. 푸이 본인은 자금성 시절 [[해럴드 로이드]]의 영화를 매우 즐겨봤기 때문에 로이드처럼 안경을 쓰게 되자 오히려 매우 기뻐했다. 이후 청나라 소조정이 없어지고, 일본과 손을 잡으면서 아내 완룽과의 사이가 나빠지면서부터는 색이 들어간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궁정 시절에는 [[자금성]]의 부패한 내무부에 대해서 개혁을 시도했을 정도로 궁정 내 부조리를 개선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레지널드 존스턴의 자금성의 황혼에 따르면, 황실의 각종 재산과 보화에 대한 실셈을 실시하여 부패한 [[환관]]들의 횡령을 적발하려 노력했으나, 자금성에 의문의 화재가 발생하면서 이러한 노력이 유야무야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 근대 철학자 [[왕궈웨이]]가 남서방행주라는 직책을 맡아 소조정의 서지, 보물 등을 조사한 시점도 이 전후로 추정된다. 그러나 [[톈진]] 시절에는 씀씀이가 매우 헤프고 사치스러운 한량이었다고 한다. 하긴 청나라 황제에 올랐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고, 만주국에선 일본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사치 외에는 따로 할 것도 없었지만, 어쩌면 그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자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는 [[베트남 제국]] 마지막 황제 [[보대제]]와 여러 모로 비슷하다.) 2023년 3월에는 선통제가 차던 [[Patek Philippe|파텍 필립]] 칼라트라바 레퍼런스 96이 경매에 나와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다. [[https://www.hodinkee.com/articles/a-rare-complicated-patek-calatrava-you-might-not-have-known-about-is-coming-up-for-auction|#]] 시계 애호가들에게는 꿈의 모델인 칼라트라바의 첫 번째 모델인 데다가 [[문페이즈]]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8개밖에 되지 않는다. 그 중 2개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Patek Philippe|파텍 필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1990년 [[Patek Philippe|파텍 필립]]이 각각 백만 [[달러]], 백 십만 [[달러]]에 산 것이다. 2023년 화폐 가치로는 도대체 얼마를 줘야 할지 모르는 지경. 시기상으로 보아 선통제가 [[만주국]] 황제를 하던 시절에 차던 것으로 추정된다. 홍콩 경매에서 67억원에 낙찰됐다.[[https://m.yna.co.kr/view/AKR20230524055800074?section=international/all|#]] 평생 5번 결혼하고 [[첩]]까지 포함해 여섯 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황후인 [[효각민황후]] 고불로씨(孝恪愍皇后 郭布羅氏)와는 사이가 안 좋았다. 효각민황후 고불로씨는 푸이와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이름인 '완룽'으로 부른다. 풀네임은 고불로 완룽(郭布羅 婉容)이며, 영어 이름은 엘리자베스(Elizabeth)였다. 완룽이 일본군 장교와 사랑에 빠져 그 아이를 임신해 출산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푸이는 그 아이의 살해를 명령했다. 1935년에 정실황후 완룽이 일본군 장교의 [[사생아]]를 임신한 사실[* 놀랍게도 완룽의 친오빠가 일본군에게 이권을 얻는 대가로, 여동생이자 황후인 완룽이 황제인 푸이 몰래 일본군 장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을 묵인했다고 한다.]을 알게 된 푸이는 완룽이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그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여버렸다.''' 또한 완룽에게는 아이가 잘 크고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숨겼다. 푸이가 아이를 화로에 던져 죽인 사실은 초판 자서전에는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기록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기를 태워죽여버린 것은 지나치게 잔인한 행위로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일이기 때문이다.] 푸이가 사망하고 한참 후에야 밝혀졌다. 푸이가 아이를 죽인 이유로는 질투심도 있을 것이고, 아이가 일본에 정략적으로 이용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엉뚱한 씨를 받은 이 아이가 청나라 장손 노릇 하는 것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아내들이 대부분 정략결혼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고, 마지막 아내인 리수셴을 제외한 모든 아내들과 이혼했다. 완룽은 [[1946년]]에 [[아편]]에 빠져 병사할 때까지도 자신의 아이가 오빠의 주선으로, 시골의 평범한 집에서 자라고 있는 줄 알았고 매달 자신의 오빠에게 양육비를 건넸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는 이 이야기가 실제 사실과 다르게 각색되어 나온다. 아이는 완룽이 푸이의 운전사([[일본인]])와 사통해 생겼고, 그 사실을 [[일본군]]도 알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영화에선 완룽이 "당신을 위해서 했어요. 아이의 아버지는 [[만주족]]이에요!"라고 하자 푸이는 일을 덮기 위해 "황후가 수태를 했소. 만주국의 후사가 생겼소."라고 둘러댔지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만주영화협회 이사장 [[아마카스 마사히코]]는 푸이에게 "네, 폐하. 여기에 아이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라며 운전사의 이름을 보여주어 푸이를 조롱한다. 그리고 푸이는 표정이 하얗게 질려서 완룽의 손을 뿌리치고 식당을 나가버리고, 아마카스는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이며 온 아시아는 일본의 영토다!"라고 의기양양해한다. 그 결과로 황실의 명예를 위해 운전사는 총으로 즉결처분.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의사가 독극물이 든 주사를 놓아 죽이는 걸로 묘사된다. 완롱 황후와의 부부 관계 또한 원만하지 못했는데, 황후의 흡연과 아편 중독과 정신병 등이 원인이었다. 자식을 두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제수가 되는 [[사가 히로]]는 푸이가 [[게이]]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했는데, 1962년 재혼한 부인 리수셴(李淑賢)은 [[게이]]설을 부정하고 [[발기부전]]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참고로 푸이를 (현대) 중국 최초의 공식 이혼남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니다. 현대중국 최초로 정식 절차를 받고 이혼한 유명인은 시인 [[쉬즈모]](徐志摩)[*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1924)|김용]]의 사촌형으로 김용 소설에서 사촌오빠들이 찌질하게 나오는 모티브가 되었다. 실제로 쉬즈모의 필명을 바탕으로 한 변태 악역이 등장하기도 한다.]이다. 쉬즈모는 [[삼국지]] [[위나라]]의 명장인 [[서황]]의 직계후손으로 1897년에 태어나 1922년 아내 장여우이(張幼儀)와 이혼한 일로 당시 중국을 시끌벅적하게 했다. 이후로 여성 편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중국에 서양시를 보급했으나 1931년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던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 완룽은 [[거란족]]의 후예라는 설도 있는 몽골계의 소수 민족인 다우르(達斡爾, Daur)족 출신이다. 만주국 붕괴 이후 공산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공산군의 학대를 받았다. 1946년 통화 사건으로 공산군과 국부군의 전투에 휘말려 크게 부상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아편]] [[금단현상]]으로 매일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었으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는커녕 공산군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이때 유일하게 완룽을 돌봤던 사람이 일본인이자 손아랫 동서인 [[사가 히로]]다.] 설상가상으로 마차에 묶인 채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등 학대당하다가[* 다만 이때 완룽은 정신질환이 워낙 심해서 일상생활도 못할 정도가 되었기에 공산군 병사들과 교도관들도 그녀를 학대하지 않고 무시했다.] 1946년 6월 20일 연길의 감옥에서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사후 [[사가 히로]]와 저우언라이가 만났을 때 이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사가 히로가 이 일을 따지게 되었는데, [[저우언라이]]는 이 일에 놀라며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고 당시 공산군 수뇌부에서 만주국 황족들을 보호하라고 지시하긴 했으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선 장병들이 일본인들과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학대가 발생했다고 해명했다. 두 번째 부인 숙비 에르더트씨(淑妃 額爾德特氏)도 유명하다. 숙비 에르더트씨는 몽골족 출신으로 풀네임은 어르더트 원슈(額爾德特 文繡)이다. 완룽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게 원슈라고 부른다. 황제 퇴위 후, 자금성에서 쫓겨난 이후 톈진의 한 저택에서 같이 살게된 완룽은 원슈를 학대했고, 원슈는 결국 푸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1931년 결국 이혼이 합의되어, 위자료 5만 5천 위안을 받고 푸이와 헤어졌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가 교사로 일했지만, 이것이 보도되어 화제가 되자 부담을 느껴 2년만에 사직한다. 이후 동생과 함께 은둔생활을 했다. 1947년 북경에서 국민당군 군인인 류전둥과 재혼했다. 이후 공산당이 북경을 장악하지만, 별일 없이 살다가 1953년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영화[[마지막 황제]] 노래들중 가장 유명한 노래인 [[https://youtu.be/PY5LQQlvWLE|Rain]]이 바로 원슈와 푸이의 이혼에 관한 노래이며 [[https://youtu.be/-yfwAdH3TME|작중 원슈가 저택을 나갈때 나온 노래다]].] 온갓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죽은 완룽 보단 훨씬 괜찮은 말년을 지냈다… 1살 [[터울]]의 바로 아랫 동생인 아이신기오로 푸제(愛新覺羅 溥傑)는 일본 귀족 [[사가 히로]]와 결혼하여 2녀를 두었다. <유전의 왕비, 최후의 황제>에서는 사가 히로와의 결혼으로 인해 푸이와 푸제가 처음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나중에는 화해하고 사가 히로 또한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실제로 푸이는 일본 여자와 결혼한 동생을 평생 일본 스파이로 의심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이복동생 아이신기오로 푸런(愛新覺羅 溥任)은 성을 진(金)씨로 바꾸고 이름을 '유즈(友之)' 로 바꾸었으며, 현재 아이신기오로 가문의 수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푸런의 아들 진위장(金毓嶂)은 자신의 다음 대부터는 성을 다시 아이신기오로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푸런은 2015년 4월 10일 사망하였다. 만주국 황실과는 별개로 청나라 황실 수장은 다른 인물이 맡으며 현재 청나라 황실 수장은 아이신기오로 헝전(爱新觉罗 恒镇, 1944-)이다. 그는 선통제의 7촌 조카이자 양자 [[아이신기오로 위옌|유얀]](毓喦)의 장남이다. 사실 선통제의 전임자인 [[광서제]]부터가 직계가 단절되어 즉위한 방계 출신 황제였으므로, 정통성 측면에서 청나라 황실의 계보는 사실상 단절된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박정희]]와도 인연이 있는데, 1942년 박정희가 만주국 소재 육군 군관 학교를 졸업할 때 우등상과 함께 금으로 된 시계를 하사한 사람이 푸이였다고 한다. 다만 박정희의 선배기수들과 달리 박정희가 졸업할 때는 푸이가 졸업식장에 나오진 않아서 직접 대면하진 못하고 시계만 따로 전달받았다. 청나라 마지막 환관인 순야오팅(孙耀庭)[* 환관이 되기 위해 거세했는데 깨어나 보니 청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푸이를 보좌했다. 그나마 푸이는 말년에 일자리도 얻고 편안하게 살았으나, 순야오팅은 만주국 멸망 후 일자리를 잃고 떠돌면서 온갖 조리돌림을 당하며 기구하게 살았다. 그나마 말년에는 운이 좀 풀려서 사찰에서 은거하면서 환관들의 생활을 증언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가 [[https://m.blog.naver.com/joonho1202/221847077205|1996년 12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은 푸이가 매일 환관들과 하인들을 때리고 폭언을 하는 등 변덕스러운 사람이라고 증언했고, 비위를 맞춰줄려고 애썼다고 한다. 다만 어려서부터 황제로 살았던 푸이가 환관들을 어떻게 봤을지와 평생 이용만 당했던 삶을 생각해보면, 그의 인간성의 문제라기보다는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자신의 말을 안듣는 동생에게 자신이 황제라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옆에 있던 환관에게 먹을 마시게 하는 것으로 단편적으로나마 푸이가 환관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여줬고 드라마 마지막 황제에서는 분량 상 더욱더 자세하게 묘사했다.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보좌한 환관이 개를 잡지 못하자 총으로 엉덩이를 쏘았고 그 상태에서 곤장 40대를 때리게 했으며 추가로 때리려고 했으나 유모의 만류로 그만두고 대신 바닥에 다식을 던져 먹게 했다. 그후로도 위안스카이가 황제에 등극하자 도주하려던 그 환관을 붙잡아 때리려고 했고, 그후 그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복직하자 뺨을 때렸다.] 가령 푸이 뿐만 아니라 중국의 황제들은 [[명나라]] [[영락제]] 등의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환관들을 그리 좋게 다루지 않았다. 푸이의 성향이 특별히 나빴던 게 아니라 원래부터 궁중에서 내려오는 뿌리깊은 악습이었던 것이다. 청 황제 중 유일하게 [[실록]]이 없는 황제이다. 청 왕조 내내 황위 찬탈이 없었던 관계[* 청나라는 초대 [[천명제]]부터 10대 [[동치제]]까지 모두 완벽한 부자 세습으로 제위가 승계되었다. 이 법칙이 깨진 게 [[광서제]]와 선통제다. 다만 선통제도 명목상으로는 광서제의 양자 자격으로 제위를 승계했다.]로 선통제 이전 청 황제의 실록은 모두 편찬되었고 [[광서제]]의 덕종실록의 경우 청 멸망 후인 1921년에 편찬되었는데, 푸이는 덕종실록이 편찬되었을 때 살아있었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생존한 탓인지 실록의 명칭을 사용한 공식 기록물이 없다. 다만 <선통정기>가 청실록의 부록 형태로 실록의 양식을 따라서 편찬되었기 때문에 선통정기가 실질적으로 실록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담으로, 죽기 직전에 [[치킨라멘]]을 먹고 싶어 했다고 [[사가 히로]]가 회고전에서 말하였다. [[트리비아의 샘]]에서는 이걸 다루고, 제작진이 직접 선통제의 무덤에 가서 치킨라멘을 조리해서 바쳤다. 경기도 구리시의 한 가정집에서 푸이의 휘호가 발견되었다.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09/21/7WUTFDO7F5DDRBUGLGYTOH6X6Y/|*]]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