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설(성씨) (문단 편집) == 경주 설씨(慶州 偰氏) == >'''[[설손]]'''은 초명(初名)이 백료손(百遼遜)[* 『[[원사(역사책)|원사]]』에는 遼만 僚로 바뀐 [[https://zh.wikisource.org/wiki/%E5%85%83%E5%8F%B2/%E5%8D%B7193#%E5%90%88%E5%89%8C%E6%99%AE%E8%8F%AF|설백료손(偰百僚遜)]]으로 등장한다.]이고 위구르 사람이다. 대대로 설련하(偰輦河)에 살았으므로 설(偰)을 성씨로 삼았다. 고조부 에렌테무르(嶽璘帖穆爾, [[https://brill.com/previewpdf/journals/tpao/94/1/article-p193_9.xml|Yolum-Temür]])[* 가승보에 따르면 [[톤유쿠크|돈욕곡]](暾欲谷)의 현손이자 극직보이(克直普爾)의 증손으로, 악필岳弼의 아들인 아사필亞思弼의 아들이다.] 때부터 원(元)에 귀부하였고 대대로 원에서 벼슬하였다. 에렌테무르의 아들이 카라부카(合刺普華)로 그의 아들 즉 설손의 할아버지 문질(文質) 때부터 강남의 율양(栗陽)[* 현재는 물 수 변 붙여서 溧陽이라고도 쓴다. 현지 발음은 리양(Lìyáng)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양기탁]]이 1938년에 이곳에서 서거했다.]으로 이주하고 한족풍으로 외자 설씨 성을 쓰는 등 한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설문질의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였던 철독(哲篤)이 설장수의 할아버지로, 그는 『[[요사]](遼史)』의 편수 작업에도 참여했으며 벼슬이 강서행성우승(江西行省右丞)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다. 설손은 [[혜종(원)|순제(順帝)]]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한림응봉문자(翰林應奉文字)와 선정원단사관(宣政院斷事官)을 지냈으며, 단본당정자(端本堂正字)로 선발되어 황태자에게 경전(經典)을 가르쳤다. 승상 합마(哈麻, 카마)의 시기를 받아 단주(單州)의 수령으로 나갔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우거하였다. [[홍건적]]이 대령을 침략하자 [[공민왕]] 7년(1358)에 병란을 피하여 [[고려|우리나라]]로 왔다.[* 이때 고향으로 갔으면 좋았는데 하필이면 고향 율양이 강남 지역으로 홍건적 세력의 핵심 지역이었다.] 왕이 원에 있을 때 황태자를 단본당에서 시종하며 설손과 구면이 있었으므로 그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집을 하사하고 고창백(高昌伯)으로 봉하였다가 부원후(富原侯)로 고쳐 봉하였고 부원(富原)에 토지를 하사하였다. (공민왕) 9년(1360)에 죽었고 저술로 근사재일고(近思齋逸藁)』가 있는데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아들은 [[설장수]](偰長壽)·설연수(偰延壽)·설복수(偰福壽)·설경수(偰慶壽)·설미수(偰眉壽)이다. >---- > 『고려사』 권112 열전 제25 제신 편 설손 조 본관은 경주 단본이다. 시조 [[설손]]은 원래 [[위구르]] 사람으로[* [[위구르인]]이라고 해서 꼭 지금의 [[동투르키스탄]]에만 살았을 리도 없고, 비록 [[몽골인]]과 [[색목인]] 위주라고는 하나 엄연히 국제적인 대제국을 표방하던 [[원나라]]였던지라, 위구르인이 [[중국]]과 [[동북아시아]] 주요 대도시로 이주해서 살지 않았을 리도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고려가요]] 중의 하나인 [[쌍화점]]의 제목부터가 [[위구르]]식 [[만두]]를 파는 가게라는 뜻이고, 거기서 대놓고 주인공 여자가 꼬시는 위구르인과 동침하는 내용까지 나온다.], 조상이 대대로 설련하(偰輦河, 셀렌가강)에 살아서 성을 설이라고 했다고 한다.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이 모두 [[원사(역사책)|원사]]에 언급된다. 설손은 원나라에서 단주태수 벼슬을 지냈으며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가 상을 당하여 대령에 가있었는데 1358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귀화하자[* 설손이 고려로 이주한 해가 고려사는 공민왕 7년(1358년), 정종실록(定宗實錄)은 공민왕 8년(1359년)으로 되어 있어 1년 차이가 난다. 어느 쪽이든 홍건적 때문에 고려로 오게 되었다는 건 공통된다.] 공민왕이 그를 대접하여 부원후에 봉했다. 설손의 아들 [[설장수]](시호는 문정)는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다만 설손의 동생 즉 설장수의 삼촌인 설사(偰斯)는 그대로 대륙에 남아 있다가 1367년 [[주원장]]에게 귀순했고 이듬해 명이 세워진 뒤 그 사실을 고려에 알리는 첫 번째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되었으며, 명나라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예부상서(禮部尙書)에까지 이르는 등 꽤 출세했다. ] 설손의 후손이 스타 강사 [[설민석]]과 그의 아버지 [[설송웅]]이다. 바둑기사 [[설현준]]과 정치인 [[설영주]]도 이 설씨를 쓴다. 인구는 2015년 기준 2,937명으로 薛씨의 10%도 못 미친다. 여담으로 [[偰]]이라는 한자는 [[완성형]]에 없는 한자이다. 비슷하게 생긴 [[楔]]로 대신 입력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