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평등 (문단 편집) === 고대에서 근대까지 === 원시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상대적 위치가 어땠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여러 가지 관점이 있는데 사냥이라는 어려운 일을 맡은 남성이 그에 대한 보상으로 권력을 누렸다고도 하고, 원시적으로나마 신앙이 발달하면서 후손을 낳는다는 행위를 성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런 성스러운 행위를 행하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수렵과 채집을 위주로 하는 원시 사회에서 농경과 목축 등이 도입되고 문명이 출현하는 과정에서 남녀 간의 상대적 위치가 남성 우위인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여성은 오직 혼인 관계 또는 혈연 관계를 통해서만 권력을 취할 수 있었다. [[클레오파트라]]와 [[하트셉수트]]를 비롯한 [[고대 이집트]] 문화권, 그리고 [[히타이트]] 같은 경우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당장 민주정이었던 [[고대 로마]]만 해도 투표권은 여성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위의 예시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오늘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편이다.] 특히 [[유럽]]의 경우에는 아테네부터서가 농업사회였기에 다소 [[가부장제]] 사회였고, 그 뒤의 로마 역시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중세시대 유럽에는 [[가톨릭]]의 [[마녀사냥]]의 이미지 때문에 여권이 낮았다는 시각이 많이 보이는데, 실제로 마녀사냥은 중세시대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시작되었고, 중세시대 유럽에는 오히려 여성의 위치를 옹호하는 입장도 있었다. 또한 도리어 [[성경]]의 영향으로[*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가톨릭]] [[성경]])] 고대에 비해 상승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일례로, 과거 [[게르만족]]은 여자를 잡아다 화살 과녁으로 쓰는 문화에 반해 중세 가톨릭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죄악시[* 당장 [[한국]]의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맛이 좋아진다|"여자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는 속담이 1900년대에도 있었고, 한국과 원수 관계에 있던 [[일본]]에도 "여자는 매질을 하지 않으면 살이 오른다"는 속담이 존재했기도 하다.]하고, 남편들이 아내와 가정에게 헌신할 것을 주장하는 등, 고대에 비해 나아진 측면도 없진 않다. 물론 가정폭력이 [[고해성사]]에서 자주 나오는 등[* 단, 이건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대했다는 반론도 된다.] 현대에 비해 낮은 건 사실이지만, 가톨릭 때문에 여권이 하락했다는 주장은 어폐가 크다. 그나마 시간이 흐르자 남성 우위의 상황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근대 들어서 보편적 인권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대접받지 못했던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 계몽 운동의 효과가 나타나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그 추세에 소수나마 교육받은 여성들도 참여하여 유의미한 성과를 내놓으면서 여성의 상대적 위치가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까지는 여성의 권리가 명확하게 보장되는 정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아시아의 상황도 가끔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비슷했다는 의견이 다수. 중국에 경우에는 엄청난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전족이 있으며, 일본도 엄청난 남성우월주의 국가였던데다가 1인칭 문제도 존재한다. 다만 한반도의 경우, 고대 시대이긴 하지만 [[소서노]]와 같이 걸출한 시조도 있었고, [[신라]] 하대에는 전쟁으로 왕위계승권자들이 전멸하자 [[진성여왕]]과 같은 여성에게 왕위를 수여했고[* [[정강왕]]이 갑작스레 죽으면서 여동생 김만([[진성여왕]])에게 왕위를 넘기는 유언을 했고, 너무 강성해져 버린 호족들의 견제 명분을 피하기 위해, 당시 최고 실력자(상대등, 왕족)이자, 진성여왕의 삼촌이자, 애인(!)인 [[김위홍]]이 진성여왕을 배후 조종하기 내세운 경우다.], [[화랑]]의 초기 리더는 여성이기도 했다.([[남모]]와 [[준정]]). 중국 측 기록인 『[[신당서]](新唐書)』의 신라전(新羅傳)에서는 '신라의 [[재래시장]]에서는 부녀자들이 모든 장사를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에 있는 [[정창원 신라 양탄자]] 유물은 귀족 여성의 이름을 [[브랜드]]로 사용하는 것처럼 여성의 활발한 사회활동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사에서는[[고려]] [[충렬왕]] 대의 재상 [[박유]](朴褕)가 뜬금없이 [[일부다처제]]를 주장했다가 부녀자들에게 죽을뻔해서 철회됐다는 일화도 있다. 조선시대도 초기에는 의외로 다소 진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권심처손씨분금문기'(15세기. 보물 549호)에서는 처와 첩, 아들과 딸을 장남을 제외하고 재산을 균등분배한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임진왜란]]이라는 대전쟁과 대기근을 거치며 조선의 경제 체제가 파괴된 이후 여성의 지위는 급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17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걸출한 여성 문인과 서간집이 다소 발굴되는데, 이후엔 여성의 지위와 학식이 완전히 감소한 이유로는 사회 혼란 속에서 가장의 권위가 중요해지고, 여성교육에 할애할 여유가 줄어들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단, 후기에도 여성 성리학자가 있기는 했다. 임윤지당, 강정일당, [[의유당일기]]를 쓴 의유당 남씨, [[규합총서]]를 쓴 빙허각 이씨 등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