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례 (문단 편집) === 교파별 신학 차이 (유아세례, 재세례) === 세례에 따른 견해는 교파마다 다르다. 보통 세례를 받으면 인간이 받은 [[원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보편교회]]와 [[성공회]], [[감리회]], [[루터회]] 등의 견해지만 한국에서 제일 많은 [[장로회]]의 경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구약의 [[할례]]를 대행한 언약의 표식이지만 원죄사함으로 보진 않는다. 장로회는 유아세례는 인정해도 구원과는 결부짓지 않는다. [[침례교회]]는 관례 정도로 본다. 일단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세례성사]]라는 형식 자체에 하느님의 은총이 임재한다고 여기며 그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세례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구원의 길이 열린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파들은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고 보며, 정식으로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증언도 많다.[* [[가톨릭]]에서는 인간의 구원의 길에 [[7성사]]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르치는데 [[개신교]] 측에서는 이 [[7성사]]와 구원의 관계에 대한 가톨릭의 교리를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7성사]]에서 세례와 성찬은 인정한다지만 성사 자체가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이라고 보는 가톨릭의 입장과 달리, 성찬과 세례는 일종의 '기념' 같은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대다수이다. 즉 '세례 받으면 신앙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이다.] 다만 현실적으로 한국의 개신교 교단들이나 가톨릭 모두 세례자를 교인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군대 등 단체 세례는 인원수가 워낙 많은데다가, 자의로 받는 경우가 아닌 사례도 많아서 개신교회의 경우 대체로 교인으로 직접 교회 명부에 등록하거나, 1년이상 출석한 사람을 교인의 기준으로 삼는 등 교단마다 차이는 있으나 '세례자 수 = 교인 수'로 세지는 않는다. [[세례성사]]를 받음으로서 원죄를 용서받고[* [[세례성사]]로써 모든 죄가 씻겨진다고 보기에 세례 전에 [[고해성사]]를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도 없다.] 신앙이 온전해진다고 가르치는 가톨릭과 달리,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과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 주장하며 세례는 부수적인 형식일 뿐이라고 본다. 개신교 신학자들의 입장에서 세례라는 형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이후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의 예식이다. 가톨릭의 중세 전통에는 세례를 받으면 그 이전의 모든 죄가 사해진다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래서 기독교 초창기 개종자들은 죽기 직전에 세례받는 풍습이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례받지 않은 몸으로 [[니케아 공의회]]를 주도했고, 죽기 직전에 세례받았다.](이는 현대 가톨릭도 마찬가지다.) 개신교에서는 세례 자체로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한다. 유아세례의 경우는 예로부터 유서깊은 떡밥이었는데, 4세기 교부시대에도 '배교자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배교자에게 성사를 받은 것은 유효한가?'가 중요한 논쟁이었고, 종교개혁시기 루터주의와 칼뱅주의(츠빙글리)에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독자 개혁노선 [[재세례파]]들은 [* 과격혁명론자들도 예외없이 재세례를 주장했으나 재세례파 중에 온건 노선도 있었고, 현재 남은 재세례파들은 후자다. 일부는 침례회에 흡수되었다.]들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성인이라도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고백한 자만이 다시 (가톨릭에서 벗어나) 재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했는데 루터주의, 칼뱅주의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루터나 칼뱅은 [[가톨릭]] 교리 중에 '''[[성경]]에 명백하게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 아니면 기존 해석과 제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혁주의가 루터주의에 비하여 가톨릭 전통주의에 더 비판적이다. 루터파는 성서의 권위를 가장 높이 보는 점은 개혁주의와 같지만 성서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한다면 성서와 충돌하지 않는 이상 전통을 일부 인정하고 명백하게 나와있지 않는 기존 전통은 중요치 않은 점으로 여긴다면, 개혁주의는 성서에 없는 전통을 필요 없는 것으로 보거나 충돌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없앨 것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재세례파는 현대 비종교인의 논리와 비슷한데 "아이가 자유의지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을 때 세례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신앙이 뭔지도 모르는 애한테 무슨짓이냐?"고 비판한다. 또한 가톨릭교회를 거짓된 교회로 여겼고 나중에 자신들을 탄압하는 루터주의와 칼뱅주의도 가톨릭에 오염(?)된 산물로 보았기 때문에 재세례파 입교자는 기존의 잘못된 신앙을 청산하고 올바른 신앙 안에서 다시 태어났음을 증명하기 위해 성인도 재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재세례파와 루터파, 칼뱅주의 개혁교단의 교회론의 차이 때문이다. 재세례파는 '자유의지에 따라 하나님을 영접한 자들만이 교회에 출석할 자격이 있다'고 보았는데, 재세례파의 주장에 반대한 루터와 칼뱅은 '교회 구성원들 모두 죄인이며, 악인도 상당수고 진정한 신앙인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뱅이 이어받은 [[아우구스티누스]] 또한, 교회는 환자들이 모인 병원 같은 존재라고 보았다.] 따라서 교회 입교에 자격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루터는 재세례파들의 재세례 논리를 케케묵은 자격주의 공로주의로 여겨 교부시기 아우구스티누스와 맞선 초기 펠라기우스주의가 되살아난 것으로 보았는데[* 펠라기우스는 원죄 자유의지 구원론 등 논제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논쟁 끝에 [[이단]]으로 선언되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펠라기우스는 기독교인이긴 했으나 "기독교가 없어도 인간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온전히 선행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주장은 논리를 떠나 성경해석에서는 중대한 결함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단처리된 것.] 루터와 칼뱅 모두 성인은 앞서 성서상 해석을 두고 비판했고 유아세례 또한 기존 성서해석을 인정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자녀를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양육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재세례파의 논리에 반대했다. 한편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다른 기독교 종파인 가톨릭의 경우, "유아세례는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다. 자녀가 지성이 발달한 후 성당에 오기 싫어한다면 안 나오면 그만이다"는 입장. 현재 가톨릭 및 [[개신교]]의 대부분 경우는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주라고 하나, 개신교 중 대표적으로 [[침례회]] 처럼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에 소수만 남은 [[재세례파]]는 앞서 [[종교개혁]]시기 다른 개신교와 가톨릭 양쪽에게 공격을 받았는데[* 초창기에는 이단 제거란 명목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게 공격받았다. 가톨릭 지역에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사형이고 개신교 지역에선 영국의 경우 한번은 경고 2번째는 추방 3번째는 수장... 그러나 루터는 재세례파들이 [[가톨릭]] [[교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비슷한 오류에 빠졌다고 봤기 때문에 비난은 했지만 복음으로 돌아와야 할 대상으로 즉 재교육 시켜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츠빙글리는 재세례파 스위스 형제단이 분리되는 것을 끝까지 막아보려 노력했으며, 칼뱅의 경우 재세례파 과부와 결혼했다. 어쨌든 이단에 물들어 교화대상으로 본 것.], 이 교파의 주장은 인간이 짓는 이런저런 죄 중에서도 순결에 관련된 죄가 가장 크기 때문에, 결혼하기 직전에 정식 세례를 받아 인생에서 가장 큰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 골자이다. 현재 캐나다 지역에는 재세례파중 후터파[*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한 비폭력 무저항주의 재세례파 상공인이 많았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율을 중요시 여겨 저울을 속이지 않고 물건을 이윤을 추구하지 않기에 물건을 싸게 팔아서 다른 종파에도 평가가 좋았고 막시밀리안 2세 시절까지는 보호받았으나 종교전쟁 발발 이후 합스부르크가 영지인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 박멸 수준으로 탄압받았고 뿔뿔이 흩어져 후에 신대륙에 정착]가 많이 이주했고, [[메노나이트]] 교도들도 유럽에서 박해를 피해 신대륙에 정착한 케이스. 재세례파 중에 [[아미시]]들도 있는데 과거 유럽에서 박해받던 전통을 이어나가 다른 교파와 교류를 차단하고 종교적 이유로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18~19세기 식의 삶을 고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