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뱃돈 (문단 편집) == 역사 == 20세기 중반 이전에 소년기를 보내신 어르신들은 한때 세뱃돈 대신 세배의 대가로 [[과일]]이나 [[떡]] 등 [[음식]]을 받기도 했다지만, 20세기 후반부터는 세배를 하면 높은 확률로 돈을 받게 되었다. 액수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1960년대에는 10원[* 화폐개혁 이전에는 100환. 그 시절에는 1원이면 왕사탕 5개를 살 수 있었고, 5원이면 [[서울특별시|서울]] 시내 전차를 탈 수 있었다. 당시 대학교 등록금은 학기당 7,000~10,000원 수준. 현재로써는 대략 5000~8000원 정도 된다.] 정도 받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물가가 상승하고 고액권 지폐들이 늘면서 100원, 500원으로 차차 늘어났고, 1982년에 500원이 동전으로만 발행돼서 1000원이나 5000원권을 세뱃돈으로 받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1만 원권 지폐를 세뱃돈으로 받게 되었다. 2010년대 들어서는 5만원권이 생기면서 액수가 크게 늘었다.[* 모두 명목 가치로 표기되어 있음에 주의. 즉 물가상승과 화폐가치의 하락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예를 들어 1960년대의 10원은 2020년 기준으로 5000~8000원이며, 1990년대의 1만 원은 2020년의 30,000원에 상응한다.] 사실 세배(歲拜)란 즉, 어르신이 무사히 한 해(특히 [[겨울]])를 넘기고 새해를 맞은 것을 기념하여 문안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은 장성하여 혼인한 자녀가 있는 어른들이 받는 경우가 많았고, 자녀가 없어도 어느 정도 연배가 되는 어른들에게는 세배를 드렸다. 이것은 단지 친족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동네 어르신들께도 예외는 아니었고[* 소작농들이 지주에게 세배를 드리기도 했고, 동네에 신분 높은 사람에게도 드렸다. 시골이 고향인 사람은 읍장, 면장, 이장에게, 도시가 고향인 사람은 동장, 통장에게도 했을 정도이다. 현재는 체감이 안 가지만, 그 당시는 [[천호동]], [[성내동(강동구)|성내동]], [[암사동]]은 물론 멀리 [[왕십리]]나 [[성수동]]에서도 [[풍납동]]으로 세배 오는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이 때 이웃집 사람들이 어르신께 인사 올린다고 찾아온 것을 빈 손으로 보내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하며 조금씩 쥐어준 것이 세뱃돈의 기원이다.[* 과거 먹을 것이 귀한 시절에는 먹을 것을 싸준다든가 평민층은 먹기 힘든 과일이라도 좀 준다든가.] 이 기원을 생각해 보면 조부모님이 성인인 부모님께 세뱃돈을 주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긴 설에 귀향하느라 밤새 운전하는 걸 보면~~ 다만 지금처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세뱃돈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퍼진 것은 90년대 들어서이다. 현금이라는 것이 지금처럼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던 시절[* 사실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까지도 시골에서는 현금이라는 것이 별 가치가 없었다. 워낙 식량이나 생활물자가 부족했으니.]에는 동네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세배 드리면 [[떡국]]과 술상을 대접하기도 했다고. [[차례]]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먹거리도 돌아가는 길에 싸서 들려보냈다고 한다. 이 당시에도 세뱃상에 대한 왈가왈부가 많았는지, 대접이 마음에 안 들거나 평소에 밉게 보던 어르신 댁에서는 행패 부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