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조(조선) (문단 편집) == 개요 == [[조선]]의 제7대 국왕. [[묘호]]는 세조(世祖)[* 세조 사후 신하들이 올린 신종, 예종, 성종 등의 묘호를 세조의 아들인 [[예종(조선)|예종]]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신하들은 최종으로 '열조(烈祖)'라는 묘호를 제시했다. 하지만 예종은 세조로 밀어붙였으며 시호 또한 열문영무신성인효 대왕 8글자를 제시하였지만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 대왕으로 20자로 지었다. 세조는 나라를 다시 만든 임금에게 주는 묘호로 [[한나라]]를 부흥시킨 [[후한]] [[광무제]]를 생각하고 따온 것이다. 예종 자신이 “[[세종(조선)|세종]]이 있어서 '세조'라는 묘호는 생각지 않았다”는 신하들의 주장에 한나라에는 [[무제(전한)|세종]]이 앞에 있고, 세조가 뒤에 있었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하여 관철된 것. 실제로는 '세조'라는 좋은 묘호를 받을만한 위인은 못 되지만, 조선시대에는 안 좋은 묘호를 받은 왕은 없기 때문에 그러려니 해야할 부분이다. 사실 조선시대 후반기로 갈수록 묘호 인플레가 일어나는데 그 시작이 세조로 정통성이나 성과가 부족한 왕일수록 그 후손의 정통성도 부족하고, 그걸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 묘호를 높이는 것. 묘호 작명법에는 나쁜 의미의 묘호들도 있긴 하지만 조선에서 사용된 일은 없다. 전임 왕의 묘호를 정하는 사람이 대부분 그의 후계자로, 친아들이면 당연하고 아들이 아닌 방계 계승자여도 최대한 선대에게 좋은 묘호를 챙겨줘야 자기 권위도 더 서기 대문이다. 또 폐위된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경우 살아있을 때 각각 반정으로 이미 국왕 신분을 상실했기에 죽을 때 묘호를 줄 이유가 없었다. 만약 연산군이나 광해군이 [[쿠데타]] 과정에서 폐위되기 직전에 자결이라도 했다면 나쁜 묘호를 받았을 수도 있다.], [[시호]]는 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휘]]는 유(瑈), [[자(이름)#s-2.2|자]]는 수지(粹之)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