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조선) (문단 편집) === 즉위 전 === <[[조선왕조실록]]>에 [[1397년]] [[음력]] [[4월 10일]](양력 환산시 [[5월 15일]])에 당시 정안군[* 정비 소생을 대군, 빈 소생을 군으로 봉하는 제도는 태종 대에 완비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차 왕자의 난]] 이전에는 군, 이후에는 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태종이 정안군일 때 태어났다.]이었던 [[태종(조선)|이방원]]과 정녕옹주였던 [[원경왕후|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고 기재되어 있다. 위로는 다섯 명의 형이 있는데 맨 앞의 3명은 어린 시절 [[요절]]했기 때문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 이은 사실상의 3남으로 자랐다. [[1408년]], 12살에 충녕군에 봉해졌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에 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어릴 적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 한번 잡은 책은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단군 이래 최고의 [[책벌레#s-2|독서광]]으로 병이 나 앓고 있을 때도 줄창 책을 읽으려 들었으므로 건강을 해칠까 걱정된 태종이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했으나 병풍 뒤에 꽁쳐놨던 《구소수간(歐蘇手簡)》[* 송나라의 [[구양수]]와 [[소식(시인)|소식]]이 서로 나눈 쪽편지를 모아 엮은 책으로, 중국에서는 이미 유실되었는데 한국에는 고려 때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이라는 책 하나를 붙잡고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얘기는 알음알음 퍼져있는 이야기. 조선에서 왕위를 이을 세자는 왕이 되면 그만이지만 그 외의 왕자는 일개 왕실 종친일 뿐 능력을 이용한 정상적인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충녕대군의 재능이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수석(암석)|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생활이 [[올라운더|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이다. 아버지 [[태종(조선)|이방원]]은 [[왕자의 난|피비린내 나는 살육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바로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 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조선/왕사|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 태종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계속되는 망나니 짓에 포기하고 말았다는게 <조선왕조실록>에 의한 사실이다. 장자 계승의 원칙을 버린 결과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태종이 [[상왕]]으로서 왕위에서만 물러나 세종의 보호자, 후견인 역할을 해준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보통 위인전에서는 세종대왕이 대군 시절 사심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본인도 자신에게 대권이 올 가능성을 인지하고 야심차게 행동했다는 근거가 여럿 있다. * 첫째로 [[양녕대군|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대군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내었다. 이 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이 세자와 비교함과 동시에 칭찬하고 신하들이 역시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고 이는 세자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 둘째로 세자의 망동에 대놓고 직언으로 간하기도 했다. 매형인 이백강[* 태종의 장녀인 [[정순공주]]의 남편]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라고 한 것이 대표적이다.[*출전1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3월 20일 4번째 기사.] 또 한번은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으며[*출전2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1월 9일 2번째 기사] 옆에 있는 신하들도 충녕대군의 말이 맞다며 모두 세자를 욕하는 등 세자의 속을 있는 대로 긁어댔다. 1달 뒤 열받은 세자가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로는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라고 오히려 두둔했다.[*출전3 태종실록 태종 16년(1416) 2월 9일 2번째 기사]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세자가 골라 했다. 이런 일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 셋째가 아주 결정적이다. 충녕대군은 자신의 집에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도중 남재가 갑자기 충녕대군에게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태종)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는 말을 했다.[* 한마디로 '[[태종(조선)|너네 아빠]]처럼 [[양녕대군|형제]]를 제끼고 [[조선/왕사|왕위]]에 오르는게 어떻겠냐'고 부추긴 것.] 이 때 남재와 충녕대군 두 사람만 있던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듣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당시의 상식으로는 꾸짖고 역모로써 고변하는 등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지만 충녕대군은 그냥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하고 웃을 뿐이었다.[* 태종실록 태종 15년(1415) 12월 30일 3번째 기사다. 과대 해석일 수도 있겠으나 태종이 여기서 웃었다는 것은 태종도 내심 셋째를 세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충녕대군이 이를 꾸짖고 부왕에게 고발했다면 남재는 [[의금부]]에 끌려가 실컷 매타작을 당하고 목이 날아가거나 유배될 정도의 매우 위험한 언행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석이든 공석이든 말 한 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는 것이 전근대 왕조의 정치판이다. 하물며 왕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꼬드겼으니 조금만 삐끗했어도 남재는 물론이고 충녕대군까지 싸잡아서 [[역모]]죄를 의심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상의 일화들을 살펴볼 때 충녕대군은 분명히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 원래 집안을 이어야 할 [[양녕대군|장남]]은 인간말종이고, 어차피 장남이 아닌 이상 차남인가, 삼남인가는 상관이 없으니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갖고 움직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교 사회에서 양대 계승 명분중 적장자 계승이 불가능하다면 남은건 '택현(擇賢)'인데 이건 말그대로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한다'''는 뜻이라 둘째든 셋째든 상관이 없었다.[* 사실 아버지인 이방원 역시 다섯째임에도 불구하고 대신들에게 세자 자리를 두고 언급된 적이 있다. 이방석이 세자에 오르기 전에 대신들에게 언급된 건 사실상 장남이었던 [[이방과]]와 공이 가장 큰 [[이방원]]이었다. 셋째인 [[이방의]]와 넷째인 [[이방간]]은 고려도 안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 더해 차남인 [[효령대군]] 역시 왕위에 대한 욕심을 내보인 정황은 없기에 절대적으로 결격사유가 있는 대군들을 제하고 보면 [[장유유서]]로 보나 택현으로 보나 삼남 밖에는 답이 없었다. 양녕의 비행이 날이 갈수록 도를 넘을 정도로 심해지자 태종과 중신들도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을 전폭 신뢰하는 모습이 기록에 나오고 있으며, 심지어 명나라 사신인 황엄조차도 '충녕대군이 부왕처럼 영명(瑩明, 총명하다는 뜻)하니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돌아다녔고 실제로 조선에서 새로운 세자를 봉해달라는 표문을 명나라에 전하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라고 바로 알아맞혔다.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른 사례는 세종까지는 해당이 안 되다가 적장자 이향이 조선 제5대 왕 [[문종(조선)|문종]]에 오르면서 조선에서 처음으로 적장자 왕이 나오게 된다. 그 후로는 적장손 이홍위까지 조선 제6대 왕 [[단종(조선)|단종]]에 오른다.]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다. 할아버지 [[태조(조선)|태조]]가 고려 왕실의 옥새를 빼앗아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아버지 [[태종(조선)|태종]]도 5번째 왕자로 왕위 계승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왕자의 난]] 두 번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군왕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개국 초에 신료들이 적장자[* [[진안대군|이방우]]가 병사한 뒤에는 [[정종(조선)|이방과]]] 아니면 공이 큰 왕자를 세자를 책봉하는게 옳다고 의견을 낸 만큼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가 바로 이방원이었다. 문제는 [[계모]]이자 [[태조(조선)|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자기 소생의 자식들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무리수]]를 두었고 이성계와 [[정도전]]도 동의한 바람에 개국 과정에서 마땅한 공이 없으며 나이도 어린 [[의안대군(이방석)|막내아들]]이 떡하니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나이, 경력, 학업 성취, 기타 등등 이방과나 이방원보다 나은 것 하나 없는 이방석을 올리는 것부터가 무리수인데 고려가 망하기 전에는 중앙 정권에 진출하기 위해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고려 [[권문세족]]들과 혼인시켜 이용해놓고 조선이 들어서자 하는 말이 "신의왕후 소생들은 하나같이 고려 왕가 혹은 권문세족이랑 엮여 있으니 부적합하다."이니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이방석이 [[청나라]]의 [[강희제]] 급으로 어릴 때부터 재능이 남다르다든지, 신의왕후 소생들이 대통을 잇기에는 능력이 모자란다든지 그런 이유라면 모를까 신의왕후의 아들들을 고려 중앙 정부 진출과 조선 건국을 위한 발판으로 써먹고 왕위는 어리고 능력도 뒷배도 공로도 부족한 신덕왕후의 소생에게 넘겨주는 셈이니 신의왕후의 아들들이나 조정 대신들이나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전주 이씨]] 집안을 위해 온갖 더러운 일을 맡아했고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은 신의왕후의 아들들도 무시하고 조선 건국 이전 죽었지만 엄연한 정실 부인이었던 죽은 신의왕후도 무시하는 처사다. 사실 무시하고 있기는 했는데, 신의왕후 한씨는 건국 직전 사망해서인지 '절비'라는 [[시호]]만 받고 왕후로 추존되지 못한 것과는 달리 신덕왕후는 중전에 올라서 왕비릉에 묻혔다.] 이에 [[신의왕후|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태종(조선)|이방원]]은 가장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왕자의 난]]으로 결국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 태종은 사실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정종에게는 서자들만 있었을뿐 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안군 이방원은 정종의 후계자로 지명될 때 세'''제(弟)'''가 아닌 세'''자(子)''' 책봉을 받았다. 신하들은 정안군이 정종의 양자이기에 앞서 아우이기 때문에 세제로 책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정안군은 세자로서 책봉받는 안을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정안군 자신이 '''적장자로서 왕위를 잇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해석된다.]은 자신부터는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어서[* 참고로 이 점은 세종과도 비슷해서 세종도 [[문종(조선)|아들]]을 좋은 임금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엄청 기울였다. 태종과 다른 점이라면 태종은 실패했고 세종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단종(조선)|손자]]는 [[세조(조선)|둘째 아들]]의 손으로 폐위되어 죽었다.] 세자의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장남이 정신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왕좌를 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유혈 투쟁을 하는 꼴은 부모 입장에서도 보기 싫었을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 역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문제는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는 계속 태종의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았다는 것.[* 여기서 세자가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왕세자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면 프레임은 '삐뚤어지는 왕세자와 총명하고 반듯한 셋째 왕자'가 아니라 '정상적인 적장자와 꼬투리 잡고 음해하는 왕자'로 바뀌어서 오히려 충녕대군에 대한 의심이 가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이런 와중에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세자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세자를 압박하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범생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땄다. 세종의 즉위 뒤 쓰여졌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후에 양녕대군으로 폐해지는 세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었다.[*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태종실록 후기에서도 충녕대군이 알고보면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있다.]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막내 동복아우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는 이 때 활쏘기나 하면서 띵까띵까 놀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자를 감싸던 태종마저도 이 사실을 알고는 "[[싸이코패스|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 요즘 말로 하면 "니가 그러고도 사람새끼냐?"]라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사실 세자에게는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다.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성씨)|민씨]] 집안을 갖은 꼬투리로 끝까지 멸문했다. 그런데 세자는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숙들[*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이 폐세자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작 세자는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마냥 외면했다. 민무휼과 민무회가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세자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세자는 "외삼촌들은 죽어도 싸다"고 비웃었다. 민무회는 어이가 없어서 "아니 대체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습니까?"라고 확 내질러 버렸다. 어린 시절 민씨 집안에서 자랐던 세자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하기는 했지만 결국 각종 개차반짓으로 입지가 좁아진 세자는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얼마 안 있어 그 일도 태종에 고변해서 민무휼과 민무회를 죽게 만들었다. 비록 [[토사구팽]]이 예정된 상태였지만, 세자가 자기의 마지막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민씨 숙청에 가담한 행동은 현명함이었을까 아니면 어리석음이었을까?[* 일단 위기를 모면하려면 외삼촌들을 외면하는 쪽이 맞기는 했다. 태종의 스타일상 뒤치기 안 해도 알아서 족쳐버릴 것이고 민무회가 한 말은 신하가 세자를 핍박한 것이라 밝혀도 아쉬울게 없다. (괜히 가만히 있다가 그 발언이 심문 중에 나오면 '뭐가 켕기길래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는 말을 숨겼냐.'는 의심만 또 살 수 있었다.) 사태가 잠잠해진 뒤 행동을 잘 했다면 태종이 "어라? 쟤 외삼촌들 때려잡은게 옳았던 건가?" 생각하게 하여 세자 자리를 보전할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었다. [* 그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쳤다는게 함정이지만 나중에 [[사도세자]]가 [[임오화변|죄인으로 몰려 죽은]] 후 [[정조(조선)|정조]]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그대로 영조의 뒤를 잇는데 성공했는데, 정조는 형제가 있었으나 자신만이 적자였고 양녕대군은 유일한 적자는 아니었다는게 좀 다르다.] 양녕대군 입장에서는 여기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매우 곤란했는데 태종이 칭병하며 양위 연극을 할 때 민무구와 민무질이 '왕에게는 세자 외에 다른 아들은 필요없다'고 한 것을 (방석의 선례가 있어 적장자와 적장자 계승의 중요성을 거칠게 말했을 뿐인데) '효령대군과 충녕대군을 죽여야 한다'는 뜻이라고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원경왕후마저 이거 때문에 명분에서 밀려 구해주지 못했는데 세자라고 답이 있었을까?]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불교)|부처]]를 받드는 선비, 그러니까 속가제자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불교]]를 멀리하려는 조선의 왕족인 만큼 대놓고 출가하지는 못했다.]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린 이유 중 하나가 술을 못 마셔서다. 태종에 따르면 "군주가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나 의전 상 아예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못먹는데 충녕대군은 마시긴 하더라"는 이유였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 그런데 사실 세종도 술을 잘 마시는 건 아니었다. [[소주]]를 겨우 1~2잔 마실까 말까 할 정도였다. 다만 당시의 소주는 도수 40도 이상의 원조 [[증류식 소주]]였기 때문에 술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두잔 먹는 것도 용한 것이긴 했다. 물론 정말 술 못마신다는 이유만으로 걸러진 건 아니고, 정확히는 "애가 그냥 순둥순둥하기만 해서 뭔 얘기를 해도 그냥 헤헤 웃고만 있다"는 말과 저 술 이야기가 같이 나왔다. 즉 일을 똑부러지지게 처리하지도 못하고 사신 앞에서 한 잔 받아 넘길 정도의 융통성머리도 없는 애를 어떻게 왕으로 앉히겠냐는 것. >'''아아!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 6월 17일 2번째 기사. 정전에 나아가 [[충녕대군|세자]]와 [[소헌왕후|경빈]]에게 책보를 내려주다.[* 태종 18년(1418) 6월 17일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충녕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는 글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너그럽고, 그릇이 크고, 품위가 있으며, 진중하다는 뜻이다.] 태종 18년(1418) 6월 3일 태종은 [[양녕대군|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다. 처음에는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충녕대군을 세자로 지명한다.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명분인 유학적인 장자 계승에 따르면 순성군이 후계를 이어가는 것이 일견 옳아보이지만, 문제는 양녕대군이 사망이 아닌 '''생존 상태에서 폐세자가 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면 원손 이개는 졸지에 [[패륜|아버지를 제끼고 세손이 되는 셈]]이므로 원손 본인부터가 입장이 난처해지는데다가 태종 사후 살아있는 양녕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지, 양녕 혹은 세손이 아버지를 폐위시킨 대신들에게 어떻게 나올지 등등 골치아픈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온 조정이 한 목소리로 반대했다.[* 태종과 양녕의 나이차는 27세로 당대 기준에서는 장자 치고 굉장히 큰 차이였다. 실제로 태종이 사망했을 당시 양녕의 나이는 고작 만28세였고 순성군은 만8세였다. 환갑을 채우면 잔치를 벌이던 당시로써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태종이 순성군이 성인이 되어 친정이 가능할 때까지 살아있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고, 설령 친정이 가능해진다 해도 역시 아버지를 폐위시킨 일을 문제 삼으면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이어서 점복으로 하는 것은 과거 [[서울특별시|한성]]으로 돌아올 때 명분으로 활용되던 것으로 천명(天命)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특히 [[성리학]]을 근본 사상으로 하는 조선에서 세자 책봉을 점복으로 한다면 큰 오점이기에 그만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녕대군을 폐세자하려는 생각을 하면서 태종이 다음 후계를 정하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도 세자 책봉 이후 양위까지 한 것을 보면 충녕대군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충녕대군은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이 평소의 망나니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 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 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재위 기간 초기에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 세종 집권 당시의 여러 가지 망나니 짓은 백성들 사이에서 양녕대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위기에 처하지 않기 위한 ([[역모]]에 엮인다든가 하는) 나름의 처신이라는 설이 있다. 죽을 때까지도 망나니 짓을 한 걸 보면 그냥 본인 성정대로 살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만, 망나니 짓을 하며 세도가의 매의 눈을 피했던 [[흥선대원군|이하응]]처럼 존재 자체로도 권력의 잠재적 위험요소가 되는 왕족에게 있어 숙청을 피하기 위한 처신은 마냥 조용히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보면 본인이 이를 의도했든 아니든 나름대로 천수를 누리고 가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종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도리어 양녕대군의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