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종연구소 (문단 편집) === 설립 과정의 강제 모금 === 5공 시절 연간 운영비용으로 당시 돈 100억 원(3년에 걸쳐 300억 원)을 확보하기 위해 [[청와대]]에서는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들에게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현대그룹]] 및 [[삼성그룹]]은 15억원을, [[LG그룹|럭키금성그룹]] 등은 12억 원을 부담하기로 결정했는데, 재계 서열 7위로 사실상 이들 다음의 대기업이었던 [[국제그룹]]이 5억 원만 내려고 하자,[*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기업 사정도 어려운 판국에 청와대가 사실상 기업 삥 뜯는 것과 마찬가지인 반강제적 모금 행위를 상당히 불쾌해했다고 한다. 사실 다른 기업들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마찬가지였다.] 일해재단 초대 이사장인 최순달[* 전두환과 대구공고 동기이자 과학자로, 국내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발사를 주도하기도 했다.]은 양정모 회장에게 아들은 미국 유학 가서 외제차 끌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나라를 위한 일(?)에는 야박하다고 비아냥조로 면박을 준다. 그리고 이때 일해재단 기부금을 적게 냈다는 이유로 미운털이 찍힌 [[양정모(1921)|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은 1985년 12대 총선 직전 [[전두환]] 대통령에게 부산 기반 최대 기업인 국제그룹이 야권 강세 지역인 부산에서 힘 좀 써달라며 사실상 선거 개입 협박을 당하게 되지만, 결국 여당인 민정당은 부산에서 대패했다. 그러자 전두환은 총선 직후 온갖 치졸한 수단으로 사실상 국제그룹을 강제 해체시키게 된다. 위와 같은 재원을 바탕으로 1986년에 세운 산하기구 일해연구소는 점차 전두환의 평생집권 기도를 위한 기구로 거듭나기 시작했는데, 전두환은 대통령 퇴임 후 일해연구소 내 사저에 거주하며 내정 및 외교에 적극 개입해 국가서열 1위로 격상코자 했다.[* 물론 [[1987년]] [[6.29 선언]]으로 대통령 퇴임은 물거품이 된 채 쫓겨났다.] 그의 구상은 국무회의에서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을 공포해 실체를 드러냈고, 13대 국회에서 새세대육성회, 새마음심장재단과 함께 [[대한민국 제5공화국|5공]] 비리의 대표적 사건으로 취급되어 5공특위의 조사대상이 된다. 기타 자세한 내용은 [[http://www.ddanzi.com/doctuPolitics/1183946|해당 기사]] 참조. 심지어 일해연구소 건설 중인 1985~86년 무렵에는 항간에서 비밀사저설, 지하벙커설, 근처 서울공항 간 지하도로 연결설 등 온갖 종류의 루머가 나돈 바 있었다. 1988년 세종연구소 개칭 후 정부정책연구소로 거듭났으나 심각한 운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원래 기금 300억으로 시작해서 이자와 골프장 임대 수입으로 운영했는데 이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부동산 투자했다가 170여억 까먹었다.--이것도 재주다.-- 그래서 2011년 기준 잔고가 37억만 남았다고 한다. [[ http://news.joins.com/article/6226563|#]] 그래서 부지 일부를 매각하기로 정부에 신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