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련/문화 (문단 편집) == 음악 == 소련의 이미지로 인해 흔히 한국에서 "소련 음악"이라고 하면 선전 가요나 군가, 클래식, 민요를 떠올리는 일이 잦다. 더 나아가, 한국의 경우 [[공산권]] 국가에서는 군가나 민요 등의 노래만 부르며 락이나 팝 등의 대중 가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민요나 선전가요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가요계 때문에 생긴 편견이다. 허나 소련만 하더라도 [[내래 인민의 락을 보여주갔어|1950년대부터 영미권 락앤롤을 모방하는 밴드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중국도 개혁개방 시절부터 [[최건(가수)|최건]] 같은 가수들이 활동하였다.] 하지만 이런 노래들을 제외하고도 소련 음악계는 음악적으로 뛰어난 인재를 대다수 배출했다. 물론 검열로 유명했던 소련에서 음악 활동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문학가들이 여러 차례의 [[필화]]를 겪었듯 음악가들 또한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이런 검열은 스탈린 시절 정점을 찍었는데, 이 시절 노래에는 반드시 스탈린을 찬양하는 소절이 들어가거나 공산당의 입장을 반영하는 내용이 필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오페라 작품이었던 "므첸스크의 맥베스"로, 이 작품이 스탈린의 취향과 맞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쇼스타코비치는 프라우다의 혹평에 시달리다 반강제로 문화계에서 한동안 숨죽여 지내야 했고, 숙청을 피하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긴 [[교향곡 제5번(쇼스타코비치)|교향곡]]을 발표해야 했다. 그러나 클래식과 대중 가요를 막론하고 의외로 장르의 다양성은 대단했으며, 이는 특히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검열이 그나마 완화되기 시작하며 확대되었다. 1968년 소비에트 [[재즈]] 페스티벌[* 과거에는 [[즈다노프]]를 위시한 당국자들의 탄압에 시달렸으나, 스탈린 사후에는 이런 기조가 완화되어 이 즈음이 되면 재즈는 소련에서 상당히 밀어주는 음악 장르가 되었다. ~~대신 락이나 메탈을 잡았지~~], 1986년 및 1987년의 록-파노라마 페스티벌 등 관제적 성격이나마 국가가 주관하는 여러 페스티벌도 개최되었다. 소련 음악가들은 서구의 음악 트렌드를 어떻게든 적극 수용하고자 음지로 노력하였고, 통념과 달리 실제로도 그렇게 뒤쳐지는 편이 아니었다. 실제로 AOR[* 이 쪽에서는 밴드 크루크(Круг)가 유명하다. 1980년대 초반 소련 전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문화부가 이를 단속하려 하자 당시 서기장이었던 안드로포프의 아내와 아들이 직접 나서서 이를 막았다는 전무후무한 뒷이야기를 남겼다.] 헤비메탈, 디스코[* 이 쪽에서는 빅토르 살티코프의 밴드 포룸(Форум)이 유명하다.], 일렉트로니카[* [[러시아]] 일렉트로닉 음악의 시조로 꼽히는 [[https://en.wikipedia.org/wiki/Yury_Chernavsky|유리 체르납스키]] 및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에두아르트 아르테미예프와 같은 인물들이 활동했으며, 밴드 중에서는 [[신스팝]] 밴드인 [[https://en.wikipedia.org/wiki/Alyans_(band)|알랸스]](Альянс)가 1980년대 대중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https://youtu.be/5sLpG4MG5J8|알랸스의 대표곡 "새벽에"(На заре)]]. 사실 서방권에서도 전자 음악은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으므로 그리 늦은 편은 아니었다. 당장 [[일본]]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나 [[서독]]의 [[크라프트베르크]]가 데뷔한 게 80년이다.] 등 당시 소련 대중가요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꾸준히 발표하였다. 특히 락 밴드 활동은 아주 빈번해서, "자생 밴드 하나 없는 공장 없고 학교 없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기록상 소련의 최초 락 밴드는 50년대 모스크바에서 출몰했으며, 사실상 관제 밴드긴 헀으나 비틀즈 등의 노래를 커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당시 환경의 열악함으로 인해 이들 중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의 기록이 실전되었다. 앨범은 고사하고 질 좋은 실황 녹음본, 하다못해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밴드가 대다수.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는 사정이 그나마 나았지만, 지방 쪽으로 가기 시작하면 상황이 절망적이다. 노이즈 잔뜩 낀 채 씹힌 카세트 테이프 한 두 개만 남아 있어도 다행이다 할 수준.] 소련의 경우 무직자는 법적으로 처벌이 가능했는데, 음악가의 경우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관제 밴드 '비아'[* 보컬-기악 앙상블(Вокально-инструментальный ансамбль), 줄여서 ВИА(비아).]에 소속되거나 솔로로 활동하더라도 당국 통제를 받아야 했다. 비아에는 매니저와 프로듀서 그리고 예술 감독이 의무적으로 배당되었고, 이들은 국가의 의견에 맞추어 밴드의 가사와 음악을 조율하고 감독/감시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일반적으로 다비트 투흐마노프 등 몇몇 선도 작사/작곡가들이 (정부의 지시에 따라) 유행을 선도하면[* 예를 들어 1960년대에는 에스트라다 스타일의 곡이 주류였다. 소련 음악을 거론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단어인 "에스트라다 스타일"은 반주보다 러시아 특유의 운율을 딱딱 맞춘 싯구 같은 가사, 기억하기 쉬운 주 선율 그리고 가수의 가창력이 중심이었으며 잔잔한 오케스트라 선율의 반주를 보통 사용하였다. 우라나라로 따지면 뽕짝기가 빠진 7080 대중가요나 포크 음악과 유사한 편이다. 알라 푸가초바가 부른 [[백만송이 장미]] 러시아판이 대표적인 에스트라다 가요다. (원곡은 라트비아 노래) 허나 시대의 흐름 또한 보수적으로나마 수용하였기에, 1980년대가 되면 사이키델릭하거나 상당히 락스러운 곡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시점쯤 되면 군 내부 음악 페스티벌에서 장병들이 헤비메탈 곡을 커버해 부르는 등 상당히 사회적으로 검열이 느슨해진 시기긴 했지만.] 이를 따라 비슷한 종류의 음악들을 만들어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보통 비아는 사랑이나 기쁨, 슬픔 등 보편적이고 가족친화적인 노래들을 주로 불렀으며, 러시아어로 번안을 한다면 영미권 음악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다. [* 그 예시가 ВИА Поющие гитары(노래하는 기타들)의 곡 [[https://youtu.be/8ibE9MnvH0o|"Синий иней"]](푸른 서리)인데, 들어보면 알겠지만 영국의 R&B 밴드였던 Eruption의 One way ticket의 선율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가사를 완전히 개작하는 경우도 있었고, 단순히 번역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반대하여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은 상당히 많았다. 이런 언더그라운드의 시작은 "바르드 가수"들이었다. 알렉산드르 베르틴스키[* 소련 최초의 반전 가요로 꼽히는 "То, что я должен сказать"(내가 말해야만 하는 것)을 부른 가수이다.],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불라트 오쿠자바]],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 등의 가수들로 대표되는 바르드는 여러 진통 끝에 그나마 안정을 제공해주기 시작한 체제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고, 과거의 혼란을 다시는 겪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자유의 부재와 부조리가 반복되는 "회색빛 체제" 소련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던 사람들의 음악이었다. 에스트라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러시아 고유의 음악 장르인 "바르드 음악"은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선율보다 가사에 주안점을 더 둔 것이 특징이었다. 이들은 기타 하나만 들고 자기가 직접 작사/작곡한 음악을 소수의 관중 앞에서 즉석으로 공연했다. [* 이런 비공식 소규모 공연을 크바르티르니크(квартирник)라고 한다. 아파트 방(квартир)에서 주로 공연했기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크바르티르니크는 불법이었다. 당국에 적발될 경우 음악가들은 하룻밤 구류를 살았고, 공연을 주선한 사람은 최대 몇 개월까지 감옥에 투옥될 수 있었다.] 주제는 일상의 감정, 전쟁의 기억, 사회에 대한 회의와 약간의 희망 등 다양했다. 관중들은 이런 공연을 레코드판 혹은 카세트로 녹음하였고, 조악한 음질에도 불구하고 복제되어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비소츠키처럼 이 과정에서 전국적 명성을 획득하는 가수들 또한 발생하였다. 물론 소련 음악인 협회에 소속되지도 않았고, 멜로디야를 통해 음반을 발매한 것도 아니었기에 이걸로 돈을 벌진 못해 대다수의 바르드 가수들은 평범하게 살았다. 특히 러시아 락 음악은 이런 바르드 전통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빅토르 초이]]와 [[예고르 레토프]]가 대표적인 가수다. 물론 언더로 활동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우선 이 경우 직업이 음악가로 인정되지 않아 많은 가수들은 투잡을 뛰어야 했다.[* [[빅토르 초이]]는 화부(stoker)였고, [[데데테|유리 셰프추크]]는 미술 교사였으며, [[아크바리움|보리스 그레벤시코프]]는 경비원과 수위로 일했다. 이 쪽에서도 서로 간의 인맥과 커넥션이 있어서, 특히 편한 직업은 타 음악가의 소개가 없으면 못 들어갈 지경이었다.] ВИА에 소속되지 않은 언더 가수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대중 매체 출연이 힘들었고[* 원칙적으로는 출연할 수 없었다. 물론 암암리에 들어가는 것까지 눈에 불을 켜고 단속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소련의 국민 영화였던 "이반 바실리예비치, 직업을 바꾸다"(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меняет профессию, 1973)를 보면 배경음악으로 바르드 가수였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의 노래가 슬낏슬낏 지나간다. 1980년대가 되면 아예 이런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전문으로 출연하는 인기가요 스타일의 프로그램 "뮤직 링"(Музыкальный ринг)이 방영되기도 했다.] 멜로디야(Мелодия)를 통해 음반을 제작하고 발매할 수도 없었으며[* 멜로디야는 소련 국영 음반사로, 당시 소련에 존재했던 유일한 음반사였다. 즉 멜로디야를 사용할 수 없다면 정식 유통망을 통해 공급할 수 없었다. 실제로 멜로디야를 사용하지 못하던 시절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 음악으로 돈을 벌지 못했다. 음반을 내도 불법 복제로 유통되다시피 하던지라...][* 이후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멜로디야는 이런 언더그라운드 락 밴드의 앨범 취입, 판매, 유통을 맡기 시작했다. 그 첫 타자가 [[마시나 브레메니]]였는데, 동료 음악가들은 이런 마시나 브레메니에게 "배신자"라는 비난까지 서슴치 않았다. 일례로, 데데테의 노래 "죽은 개 발로 차지 마라"(Не пинайте дохлую собаку, 1985)는 보컬 셰프추크 본인이 마시나 브레메니의 메이저 진출을 두고 마시나 브레메니의 멤버인 마카레비치를 저격한 곡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곡이다.] 공식적인 공연도 사실상 개최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앞서 언급된 크바르티르니크를 위시한 각종 불법 공연(racketeering)이 횡행했으며 사설 스튜디오 영업 또한 활발했다.[* 레닌그라드의 안드레이 트로필로(안트로프 스튜디오)나 알렉세이 비시냐(얀시바 셀라 스튜디오)처럼 집이나 자신의 소유 건물에 사설 스튜디오를 차려 설비를 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더 나아가, [[아크바리움]]의 "라디오 아프리카"(1983) 앨범처럼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몰래 시설을 임대해 녹음 작업을 한 경우도 있었다. 참고로 당시 뇌물을 먹이고 앨범을 찍은 곳은 그 유명한 키로프 극장. 재미있게도 이런 사설 스튜디오에서 음반을 녹음했다는 게 (사실 많은 경우에는 그렇긴 했으나) 반드시 조악한 저품질 결과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일례로 1980년대 초중반부터 활동한 언더 밴드 피크닉(Пикник)의 1/2집은 사설 스튜디오 작업물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시중에 나도는 리마스터링판은 상당한 음질을 자랑한다.] 당시 문화부를 위시한 소련 당국은 이러한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에게 당근과 ~~좀 많이 가혹한~~ 채찍 정책을 적용하였다. 우선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레닌그라드는 당시 러시아 락의 사실상 중심지로 기능했다. 소련 제2의 도시이자 서방 세계였던 핀란드와 접해 있어 서방의 악기와 음반을 그나마 쉽게 밀수할 수 있었던 점이 한 몫 했다.], 스베들로프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등 일부 대도시에는 "락 클럽"을 열어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공식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놀랍게도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라 할지라도 해당 시설에서는 정규 공연이 가능했다. 물론 검열과 감시는 피할 수 없었다.[* 정부의 감독관이 공연 셋리스트와 가사 등을 검열했으며, 하다못해 관중들의 태도까지 감독했다. 락 공연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래카드나 환호성조차 규제당해서 마치 오페라를 관람하듯 점잖은 차림으로 자리에 앉아 매 공연이 끝날 때마다 박수로 화답하는 것 외에는 큰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이름답게 주로 락 밴드들의 많이 활동했지만 팝이나 일렉트로닉 장르의 음악도 맛볼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락클럽의 설립을 주도한 자는 한때 고르바초프와 함께 서기장 후보로 꼽히던 그리고리 로마노프(1923 - 2008)였다. 그리고리 로마노프는 정치적으로 보수파였는데, 해당 시설의 설립을 통해 "반동분자"들을 한데 모으고 의견을 종합해 이들을 감시하는 게 그의 목적이었다.] 또한 너무 인기를 누리거나 '불건전한'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터치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시 말해 높으신 분들의 심기에 조금이라고 걸리는 게 있으면 가차없는 탄압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며, 이는 특히 1982년부터 1984년 사이에 절정을 달했다. 당시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연달아 사망하자 소련 당국은 일명 '기강 잡기'에 들어갔고, 특히 이 때 활동하던 언더 가수들은 조금이라도 인기를 끌거나 '불순한' 제스처를 보이면 바로 탄압당했다. 몇몇 사례를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 크루크(Круг): 80년대 소련을 휩쓸었던 AOR 밴드. 건전한 노래를 주로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인기를 끌었다'는 이유로 밴드가 해체될 뻔했으나, 안드로포프의 부인과 아들이 직접 나서 말린 덕분에 간신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 [[데데테]](ДДТ): 부조리와 전쟁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노래를 발표하였고, 그 덕분에 지역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아마추어 음악가' 등 3인이 지역 신문에 발표한 사설에서 제대로 털렸는데, 훗날 본인들이 인정했듯 사실상 언론의 이름을 빌린 KGB의 다굴이었다. 당시 사설을 보면 노래 가사에 '신'이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바티칸의 하수인이라는 소리를 듣는 수준이었다.] KGB에 압수수색을 당하는 등[* 이 와중에 당시 작업한 앨범 원판이 압수되었고 이후 분실되었다. 당시 앨범 제작을 맡았던 사운드 엔지니어가 훗날 복구하긴 했지만.] 각종 고초를 겪었다. 결국 리더인 유리 셰프추크는 본진인 우파를 떠나야 했고 이후 레닌그라드에서 밴드를 새로 꾸렸다. * [[크루이즈]](Круиз): 항목 참조. 인기를 끌던 와중 당국의 지시로 강제로 밴드가 해체되었고, 한동안 앨범 작업을 하며 셋방살이를 전전하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3인조 헤비매탈 밴드로 부활했다. * [[예고르 레토프|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항목 참조. "불건전한" 음악을 했다는 이유로 멤버 [[예고르 레토프|한 명]]은 '''정신병원에 3개월 수감되어 각종 약물을 주입당했고''' 한 명은 '''심장 문제에도 불구하고 강제 입대처리되어'''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 기지에서 복무했다. * 인스트룩치야 포 비지바니유(Инструкция по выживанию):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와 비슷한 케이스. 반항적인 노래가 문제가 되어 리더는 다른 도시로 강제 이주당했고, 멤버 둘은 강제 입대당했으며 미성년자 멤버 한 명은 반강제로 대학교에 진학당했다. 당시 작업한 앨범도 압수당했는데, 복제를 떠 둔 것이 없어 결과적으로 영영 분실되었다. * 지그재그(Зигзаг): 모스크바의 중소규모 밴드. 반항적인 가사와 공연 당시 멤버 한 명이 가짜 권총을 들고 포즈를 취한 게 문제가 되어 해체되었다. 당시 작업한 앨범 원판을 압수당한 것은 덤. 여담으로 이 밴드의 리더가 훗날 마스테르(Мастер)와 아리야(Ария)로 유명해지는 안드레이 볼샤코프(Андрей Большаков)이다. * 데카(ДК): 1980년대 모스크바에서 활동했던 밴드로 훗날 [[섹토르 가자]] 등에 영향을 미친 로파이 음악이 특징이다. 아트락부터 엑스페리멘탈 록까지 상당히 다양한 수준의 스펙트럼을 자랑했으며, 풍자적인 가사와 반소비에트적 활동으로도 유명했다. 리더 세르게이 자리코프는 KGB에 협조하는 방식을 통해 가까스로 밴드 해체를 막아냈다. * 코로지야 메탈라(Коррозия металла): 198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헤비메탈 밴드로, 1985년 어느 건물 지하실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개최했으나 시작 10분 만에 "훌리건의 분탕"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들이닥친 경찰의 손에 끌려가는 기록을 달성했다(...) 이러한 탄압은 1984년 절정을 찍었고, 고르바초프 취임 후인 1985년부터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는 더 느슨해져 언더그라운드 측에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노래가 발표되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소련의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라고 불리는 포돌스크 페스티벌(1987)이 개최된 것도 이 때이다.[* 당국 몰래 진행한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황을 녹화한 자료가 상당수 남아 있다. 아이러니한 건 분명히 공식 관제 페스티벌이었던 록 파노라마 86/87의 경우 전체 영상이나 녹음은 전혀 남아있지 않으며 개인이 알음알음 찍은 저화질 영상이나 녹음 정도만 남아 있다. 멜로디야에서 동명의 앨범을 출시하긴 했는데, 실황이 아니라 참석한 밴드들의 앨범판 곡을 그대로 수록해 발매한 일종의 컴필레이션 앨범이었다.] 당시 활동했던 유명한 밴드로 [[키노(밴드)|키노]][* 본격적으로 탄압의 광풍이 휘몰아쳤던 1980년대 초반 키노는 훗날의 유명세와는 달리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의 레닌그라드 지역 밴드였던지라 탄압이나 피해를 받진 않았다. 이들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변화의 투사' 이미지를 얻은 것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발표된 앨범 [[그루파 크로비|혈액형]](1988) 공개 전후였다.], 알리사, 주파르크, [[아크바리움]], 스트란니예 이그리,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 등이 있다. 잘 언급되지는 않으나, 70년데 후반에서 80년대는 ~~이런 데서는 쓸데없이 자본주의 서구 열강의 전통을 충실히 따라~~ 언더와 공식 음악계를 가리지 않고 각종 사회적 문제들도 터져나오는 시기였다. 약물[* 그 유명한 비소츠키는 알코올에 진정제 중독자였으며, 비아 중에서도 마약 복용이 걸려 멤버 전체가 물갈이된 사례가 있었다. 각종 [[마약]]과 술에 탐닉해 안 그래도 선천적으로 약하던 몸을 더 갉아먹은 [[예고르 레토프]]야 말할 것도 없는 케이스.], 매니저의 탄압[* 헤비메탈 밴드 아리야가 그 예시. 원래 아리야는 비아 출신이었고, 비아는 공식적으로 감독과 매니저가 배정되었다. 그런데 아리야의 매니저였던 벡슈타인은 자금을 횡령하고 멤버들을 핍박하는 등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고 결국 아리야 멤버들은 뛰쳐나가고 만다.], [[밀리 바닐리]] 수준의 립싱크[* 80년대 팝 밴드였던 미라시(Мираж)가 그 예시. 여성 보컬 타티아나 옵시옌코를 내세워 인기를 끈 팝 밴드였는데, 정작 옵시옌코는 TV 출연 담당이었고 진짜 보컬이 따로 있었다. 결성 당시 진짜 보컬은 이리나 솔티코바(Ирина Ивановна Салтыкова).], 갑질[* 80년대 러시아의 슈퍼스타였던 알라 푸가초바가 그 예시. 당시 타 음악가의 노래를 뺏어가거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가수를 핍박하는 등 각종 텃세를 부렸다는 증언이 수두룩하다.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에게 꼽사리 낀 것이나, 망언 제조기로 유명한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와 한때 관계를 맺은 것도 자주 등장하는 비판.], "예토전생"[* 80년대 초반 [[튜멘]]에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밴드였던 "인스트룩치야 포 비지바니유"이 그 예시. KGB의 탄압에 밴드가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튜멘 락 클럽의 직원이었던 로만 네우모예프가 사실상 다시 부활시켰다. 이후 원 멤버들과 노래 저작권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으나, 밴드는 현재까지고 활동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러시아 위키피디아에 "쇼 비즈니스의 상어"로 직접적으로 언급된) 네우모예프는 이전까지 가수와 거리가 먼 생활을 했으나, 예토전생 과정에서 기타를 배우고 보컬로 나서게 되었다.] 등 온갖 문제가 터져나갔으며, 이고리 탈코프 총격 사건은 80년대 소련 음악계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이고리 탈코프는 80년대 소련의 대중음악 가수로 1992년 자신과 갈등을 빚던 프로듀서에게 나강 권총으로 피살당했다. 프로듀서는 유대인 출신으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스라엘로 도망쳤는데, 본인은 현재까지 자신은 누명을 쓰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피의자 인도를 거부해 한동안 수사가 난항을 맺다 2022년에서야 간신히 불구속 기소가 된 상황.] 물론 빽판 즉 복제 음반도 아주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사실 저작권에 대한 낮은 인식은 소련과 90년대 러시아에서 아주 만연하던 문제였다. 당국 탄압도 있었지만, 여하간 소련 시절 음악가들이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하던 데는 이런 복제가 한 몫 했다.][* 90년대 해빙 이후 비틀즈 측은 특별히 러시아 전용으로 비틀즈 앨범들을 풀었는데, 도를 넘은 불법 복제로 비틀즈 측이 빡돌아서 다시는 러시아에 앨범을 팔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썰이 존재한다.] 빽판 제작 대상은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앨범부터 멜로디야 공식 앨범 및 영미권 음악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70-80년대 카세트테이프가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이전에는[* 카세트테이프 빽판은 특별히 "[[사미즈다트|마그니티즈다트(магнитиздат)]]라고 불렸다.] 일명 "료브라"(ребра, [[갈비뼈]])라고 불린 LP 빽판으로 음악이 유통되었다.[* [[늑골]] 항목 참조. 당시 소련에서는 병원에서 폐기한 X-레이 필름을 가공한 뒤 밀수해 온 레코드에 대고 눌러 찍는 방식으로 빽판을 제작하곤 했다. 뼈 사진이 찍힌 필름으로 만들었다고 "갈비뼈"(ребра)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보통 5~10회 재생하면 망가져서 더 이상 재생할수 없을 정도로 저급품이었지만, 그럼에도 1루블~1루블 50코펙 하는 싼값에 많이 배포되었다. 1948년 레닌그라드에서 처음 제작되었으며, 1950~60년대 소련 언더그라운드 문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1970년대에 카세트 테이프가 대중화됨에 쇠퇴하였다.] 클래식의 경우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등이 있었으며, 유명한 피아니스트로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 등이 있었다. 대중 가요의 경우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많은 가수들이 활동했으며, 나무위키에 문서가 생성된 가수/밴드만 하더라도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불라트 오쿠자바]], [[아크바리움]], [[마시나 브레메니]], [[빅토르 초이]], [[마이크 나우멘코]], [[아욱치온]],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 [[크루이즈]], [[예고르 레토프]], [[드미트리 셀리바노프]], [[얀카 댜길레바]] 등 상당히 많은 수가 활동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