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론 (문단 편집) === 서인의 분열 === [[숙종(조선)|숙종]] 시기에 있었던 잦은 [[환국(조선)|환국]]으로 인해 [[서인]]과 [[남인]]의 처지는 자주 바뀌었다. 일단 [[예송논쟁]] 때 숙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주면서 서인들은 밀려났고, 숙종 초까지는 조선 시대에 단 한 번 있었던 남인천하였다. 그러나 1680년, 남인의 이환이 서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한성부에서 괘서 사건을 벌였다가 실패했고, 밀려난 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서인에서 남인들을 몰아낼 기회를 포착한다. 바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이자 당시 서인의 거두였던 [[김석주]]가 '남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한 것. 남인 측에서는 북벌을 주장하는 이들([[윤휴]], 허적 등등)의 힘이 강했고, 이들은 북벌을 명분으로 18,000명을 무과로 뽑아두고 군사 훈련을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남인과 숙종이 물밑으로 북벌과 군사 부분에서 협력하는 관계였다면 오히려 서인들이 역풍을 맞고 박살날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으나, 남인들에 대해 현기증을 느끼고 있던 숙종에게도 절호의 기회였다. 이에 뒤이어 일어난 삼복의 변 등으로 인해 최초의 환국인 [[경신환국]]이 발생하며 남인 정권은 10년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되고 다시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헌데 정권을 잡은 후 남인들의 처리 문제를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로 갈라졌다. 강경파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온건파는 [[윤증]]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남인들의 처리 문제뿐만 아니라 강경파는 민생과 명분을 중시하고, 온건파는 북방 개척과 실용을 중시하는 등 관심을 가진 분야도 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