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론 (문단 편집) === [[영조]] ~ [[정조(조선)|정조]] 시기 === 그러나 소론의 짧았던 집권 시기는 금방 끝났다.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영조가 즉위한 후 잠깐은 [[이광좌]]가 영의정, [[류봉휘]]가 좌의정으로 임명되면서 소론 정권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소론이라는 당은 영조에 대척했던 당이었기 때문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고 정권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론을 완전히 박멸하고자 삼수의 옥을 확대할 것을 영조에게 청했다. 이에 영조는 경종의 지시를(김성 궁인이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 인용하면서 이를 거부한다. 이때 노론계 유생 이의연이 노론 4대신이 모함당해 억울하게 죽었단 주장을 했고 분노한 완론 소론이 반박하며 강하게 벌줄 것을 청했지만 영조는 의견을 낸 것을 어찌 벌할 수 있냐고 거부한다. 보다 못한 [[이광좌]] 등의 완론 소론 대신들까지 청하고 나서야 겨우 절도 정배를 명했다. 이건 노론 편을 들겠다고 왕이 선포한 거나 다름없었다. 사학 유생 이봉명이 [[김일경]]이 역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벌줄 것을 청하자 영조는 이의연도 처벌했으니 얘도 처벌해야 겠네라며 일개 유생과 재상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어마어마한 편파적인 태도를 보이며 즉각 받아들여 삭출함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영상 이광좌가 이의연의 국문을 청하자 잘됐다면서 김일경도 국문할 것을 지시하며 사실상 삼수의 옥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명했다. 이는 당시의 고변자 [[목호룡]]이 끌려오면서 확실해졌다. 김일경과 목호룡 모두 자신의 무죄를 강변했고 김일경은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쳐들며 영조의 추궁에 조목조목 항의했으나 영조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고 고문을 더 가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목호룡은 맞아죽고 김일경은 저잣거리에서 참해졌다. 이에 기세등등해진 노론의 총공격이 시작되었고 영조는 다 끝난 걸 뭘 그래~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완론 소론 대신들을 죄다 내쫓고 정호, 민진원, 홍치중, 김재로 등의 노론 대신들로 삼정승을 비롯하여 조정 수뇌부를 채워넣는다.[* 을사처분이라고도 한다.] 4대신 이후 노론의 수장이 된 초강경파 [[민진원]]과 정호가 소론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고 영조는 즉각 호응하여 4대신을 신원하고 [[삼수의 옥]] 당시에 죽은 사람들을 모조리 신원하는 한편 당시 정권을 이끈 소론 대신들을 벌주었다. 완전히 신이 난 노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미 죽은 [[조태구]], [[류봉휘]]는 물론이고 살아있던 [[이광좌]], 조태억, [[최석항]] 등을 모두 죽일 것을 청한다. 하지만 영조는 거부했고 노론을 설득하여 더 이상의 보복을 막으려 했지만 노론은 막무가내였다. 탕평의 길을 걸을 계획이었던 영조는 결심을 굳혔고 노론 탕평파 홍치중을 제외한 101명의 노론 신하들을 내쫓고 62명의 소론 신하들을 불러들였으며 조태채를 제외한 4대신의 신원을 철회함으로 삼수의 옥 사건을 사실상 원위치 시켰고 다시 소론 정권을 내세웠다. 이것이 바로 [[정미환국]]이다. 한편 정권에서 밀려난 소론(주로 급소, [[준소]])들과 [[남인]]들은 경종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는 식으로 영조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경종 독살설]]까지 나오면서 그들은 난을 일으킬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정미환국]]이 터지고 이광좌를 중심으로 한 소론 완론 정권이 세워졌음에도 같은 당파임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도 않던 [[준소|소론 준론]]은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 반란은 삼남과 평안도, 서울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초대규모였으나 호응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서울과 평안도 지역 반란군은 봉기 전에 수뇌부가 체포됨으로 제압되었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방면의 반란군도 각개 격파당한다. 이 결과 소론 준론들은 박살이 나면서 세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잔당들이 계속해서 난을 일으키려 했다가 그때마다 족족 발각되면서 소론 준론들은 그야말로 씨가 말라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1755년 윤지의 [[나주 괘서 사건]], 심정연, 신치운, 류봉성 등의 역모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영조]]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전한 것이 결정적이였다. 심정연은 영조가 친히 행차한 과거 시험장에서 윤지 등을 옹호하고 영조를 가멸차게 비난하는 글을 올리는 용자 짓을 했다. 게다가 신치운은 국문장에서 영조의 역린인 [[게장]]까지 언급하며 [[경종 독살설]]로 물고 늘었고, 이에 영조는 이성을 잃고 입에 거품을 물며 울기까지 했다.[* 본래 영조가 자주 울긴 하지만, 영조는 정치적으로 매우 냉정한 사람이였다. 그래서 이런 류의 상소를 보거나 말을 들으면 사관들에게 쓰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이렇게 명령하지도 못했다. 정말 충격 받은 것.] 사건 직후 영조의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천의소감을 편찬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나마 온건파인 [[완소(붕당)|완론]]이 소수 [[남인]]과 함께 정계에 머물렀지만 노론의 세력이 훨씬 더 커서 힘을 쓰진 못했다. 사실 영조 재위 중반기까지는 소론의 영향력이 컸지만, 가면 갈수록 노론의 영향력만 강화가 되었고, 결국 영조 재위 후반기에는 사실상 노론이 장악하는 세상이 되었다.[* 노론 7 : 소론 2 : 남인 1에서 노론 8 : 소론 1.5 : 남인 0.5 정도.] 한편 정조가 즉위한 후에는 엄격하게 붕당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준론 [[탕평책]][* 영조 시대엔 완론 탕평으로, 각 당파에서 탕평에 찬성하는 인물들 위주로 등용했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탕평당이란 이름이 생기고, 척신들이 판을 치자 정조는 각 당파의 의리를 중요시하며 그 의리를 정치에 보여주라는 준론 탕평을 실현했다.]을 실시함으로서 노론과 소론 그리고 [[남인]] 계열이 함께 등용되면서 잠깐 빛을 보기도 했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고 [[세도 정치]]가 시작되면서 붕당이 아예 소멸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