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양강댐 (문단 편집) === 설계 === 1960년 [[미국]]의 토목회사인 스미스 힌치먼 앤 그릴스(Smith, Hinchman & Grylls)에 의하여 현지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당초 제안된 형식은 108m의 '''콘크리트 중력댐'''이었다. 1962년 11월 건설부는 [[일본]] 공영과 소양강댐 기술조사 및 설계 용역을 체결하였는데 콘크리트 중력식이 무난하다는 고찰이었다. 1967년에는 건설부가 한강유역 합동조사단의 건의에 따라 높이 122m의 중력댐을 검토하게 되었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건설 기간 중 돌발 사태에 안전을 기할 수 있으며, 댐 완공 전에라도 발전을 개시할 가능성이 있고, 국산 시멘트 사용은 국가 경제에 호경기를 가져오리라고 판단했다. 1968년 5월, 건설부는 예비설계를 마치고 곧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본설계까지 실시하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시공을 맡은 [[현대건설]]은 록필(rockfill) 사력식이면 총공사비 203억원 규모에서 34억원의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으며 공기도 5년에서 4년으로 1년 단축할 수 있다고 설계 변경을 제의하였다. 콘크리트 중력댐은 우리나라의 철근, 시멘트 등 건설자재 생산능력의 부족과 막대한 수송비 등으로 막대한 건설비가 소요될 예정이었다. 소양강댐 건설지인 춘천 신북 일대에는 사력댐에 필요한 바위, 자갈, 모래 등이 풍부한 점이 착안되었다. 또한 콘크리트 댐은 건설 과정이나 평시의 안정성은 높지만, 전시 각종 공격에는 취약하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이유도 들었다. 콘크리트 댐은 폭탄에 맞았을 때 구조가 파괴되지만, 사력식 댐은 그런 식의 충격에서 강하다. 당시는 [[6.25 전쟁]]이 일어난 지 1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 게다가 건설 계획이 벌어지던 1967년에서 1968년까지는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21 사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무수히 많은 북한의 대남도발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드라마 [[영웅시대]]에서는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이 재현 또는 언급이 되었다.]이었고, 댐을 건설하는 위치가 [[삼팔선]] 바로 아래라서 특히 전쟁에 대한 대비를 고려해야 했던 시절이다.[* 다만 현재 [[군사분계선|휴전선]]은 동부전선이 38선보다 북상한 덕분에 소양강댐에서 북한까지의 거리는 30km가 넘는다.] 이렇게 현대건설의 고집으로 1968년에 중반에 이르기까지 설계변경안으로 마찰을 빚는다. 착공이 1967년 4월이었는데, 대단히 늦어진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선 [[정주영]] 회장은 당시 [[한일기본조약]]의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받은 보상금을 소양강댐 건설에 사용하였는데, 최초 설계사인 일본공영이 유리한 설계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공사비를 착복할 의도가 있었으며, 건설 사정에 밝지 않은 건설부가 이에 넘어갔다는 식의 진술을 했다. 때문에 그건 안된다고 계속 반대해 건설부 장관과 대동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마음을 돌렸다는 설이 있다. 반면 건설교통부/수자원공사 관료들의 주장에 따르면[[https://www.joongang.co.kr/article/2721094#home|#]] 이런 자리는 없었고, 건설부 장관의 단독 보고 과정에서 대통령이 사력식댐이 적절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무엇이 진실이든 결국 콘크리트 댐 대신 사력식 댐이 지어지게 된다. 이는 포병장교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콘크리트 댐이 적 공격에 취약하다는[* 실제로 댐은 파괴되면 고속으로 흐르는 유류와 토사가 최소 시 단위의 피해를 입힐 것이므로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 아니겠냐는 주장도 있는데 진짜 이것 때문인지는 확인된 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