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중화 (문단 편집) === [[일본]] ===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아이누]](=에미시, 에조), [[하야토]], 그리고 [[한반도]]의 국가를 포함하는 일본이 주장하던 종주권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것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대외적으로 최초로 언급된 경우는 5세기 경에 일본에서 중국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의 왕을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백제]].[[신라]].[[가야|임나]].[[진한]].[[마한|모한]])六國諸軍事(6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으로 자처한 것을 꼽는다. 중국은 삼한과 [[신라]]의 지배는 인정해도, [[백제]]의 지배는 인정하지 않았다. 백제의 구이신왕이 이미 일본보다 먼저 중국으로부터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百濟諸軍事(백제제군사)鎭東大將軍(진동대장군)百濟王(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유학계에서 [[진무 천황]]이 사실 [[춘추전국시대]] 오나라 [[태백]]의 후손, 혹은 형제라는 속설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고고학적인 연구결과를 보면 오나라와 월나라 멸망당시에 상당수의 유이민들이 배를 타고 한반도 중남부나 왜국으로까지 간 경우는 있었고, 이들이 [[야요이 시대]]의 주역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진무 천황이 진짜로 오나라 왕실의 후예인것은 아니다. 이후에도 일본 제국주의에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은 한때 [[존황양이|서양인들을 오랑캐라고 비하]]했던 일본식 중화사상을 가졌던 세력들이었다. 이후 이들 중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가 나뉘어 알력 다툼을 하는 양상이 된 것. 또한 [[청일전쟁]]으로 중국을 무력화한 후에도 계속해서 중국을 침공한 것이 주위의 다른 곳보다 털어먹기 만만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이러한 중화관이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다. [[일본군]] 등의 고위층에서는 여타 동아시아가 그렇듯이 [[한문]] 문학 등 고전시대 중국 문화를 교양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런 여러 전통적 경향에 의거한 '''고대''' 중국을 향한 동경심[* [[근세]] 이후부터 [[중화민국]] 시대의 중국은 일본이 보기에 [[아편전쟁|아편 환자]] 오랑캐들의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이 중국에 대한 적극적 진출로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다. 이는 당시 나치를 비롯한 독일과 영미권 게르만 북유럽의 민족주의자, 극우파들이 고대 로마, 그리스, 이집트에게는 열광했으면서도 막상 실존하던 남유럽, 지중해 세계와 지중해권 사회들은 인종차별적으로 경멸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