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크라테스 (문단 편집) == 개인적인 삶 == 석공인 소프로니스코스(Σωφρονίσκος)와 산파인 파이나레테(Φαιναρέτη)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인도 본업이 석공이었다고 전해진다. 외모는 [[추남|못생겼었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외모지상주의]] 풍조가 있던 당시 [[아테네]]에서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고발되어 잡혀온 창녀가 예쁘다는 이유로 무죄방면 되기도 했고,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에는 질 게 뻔한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회의에서 퇴각해야 하는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했지만, '''못생겼다'''는 이유로 그의 주장이 묵살당한 병사의 이야기도 나온다. --고대부터 이어져온 외모지상주의--][* 당시 [[아테네]]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문화관을 갖고 있었고, 그들이 추구하는 제1의 미는 '인간의 아름다움'이었다. 오직 인간만이 지성을 갖고 철학적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이 스스로에게 도취된 결과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알려진 것도, 그의 [[알키비아데스|미남 제자]]가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면서부터였다 하니,[* 알키비아데스는 그냥 평범한 시민 1인 소크라테스와 달리 혈통도 엄청나긴 했다.] 아테네의 외모지상주의나 소크라테스의 추모(醜貌)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대략 짐작해 볼 만하다.[* 하지만 크세노폰의 기록에 따르면, '용맹하고 남자의 풍모가 넘치는 미남'이라고 한다. 다만 크세노폰은 뼛속까지 소크라테스 빠돌이였다는 것이 거의 정설이라는 점을 참고하자.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서는 둘 모두를 고증하여 얼굴은 반반하지만 아테네의 미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파오후]]'''로 등장한다.] 플라톤의 저작 『메논』에서 메논은 소크라테스와 논쟁 중에 그를 '전기가오리 같다'고 비하하기도 했다.[* 못생긴 외모와 더불어 말솜씨로 사람들을 현혹한다는 의미를 담은 표현. 사실 앞뒤 대화내용을 보면 논리로 한번 털린 다음 못생긴 궤변론자라고 까며 정신승리한 것에 가깝다.] 그러나 외모를 불문에 부치고도 그의 풍모는 상당히 비범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발을 신지 않고, 누더기가 되기 직전의 옷을 걸치고 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서 난 이렇게 다녀도 익숙해서 편하고 정신력도 단련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옷이나 신발에 길들여져서 불편한 거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와는 달리 플라톤 대화편의 묘사로는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서도 완전히 거지처럼 돌아다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초연한 풍모를 과시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석공 출신이라 그런지 상당히 튼튼한 몸을 타고난 것으로 여겨진다. 잔치 자리에서 술을 가장 많이 들이키고도 가장 말짱한 정신으로 가장 늦게까지 토론을 하다가 유유히 떠날 수 있는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알콜 분해력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또한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에도 배고픔이나 목마름, 추위, 더움, 잠자리, 적군 등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던 강철멘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게다가 사색을 즐겨 하여, 어떤 문제가 떠오르면 해답이 떠오를 때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만히 서서 몇 시간이고 길게 생각에 잠기다가 해답을 찾고 자리를 떠나는 일이 종종 있어서 다른 아테네 사람들이 구경하였다고 한다. 여러 모로 기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의 [[아내]]였던 크산티페는 못생긴 악처(惡妻)였다고 전해지는데,[* 플라톤은 사모(師母)라고 할 수 있는 크산티페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거의 없었다. 부정적인 묘사가 없다기보다도 철학적인 면을 조명한 바가 크기 때문에, 크산티페가 등장하는 대목이 얼마 없다. 개중에 부정적인 묘사라고 하면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크산티페가 울부짖었다는 정도다. 근데 남편이 죽는데 울부짖지 않으면 그게 더 나쁜 부인이 아닌지? 크산티페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는 대개가 다 [[크세노폰]]으로부터 비롯한다. 일례로, 《향연》(2.10.)의 보고에 의하면, 안티스테네스가 '어케 그런 까탈스러운 사모님과 함께 사십니까?'라고 묻자, 소크라테스가 '훌륭한 기수는 오히려 기가 센 말을 다루어 보려고 하듯이, 내가 내 아내 같은 사람을 견뎌낼 수 있다면 다른 어떤 사람들과도 교제할 수 있으니까'라고 대꾸한다.] 사실 앞뒤 정황을 따져보면,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오히려 현처(賢妻)였을 가능성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사실 아내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돈도 없는 주제에 맨날 돈 많은 사람(대표적으로 플라톤)과 사색한답시고 수다나 떨러 다니는 남편으로, 집안 살림은 크산티페가 다 책임졌다. 소크라테스가 물려받았으나 운영 등에 무관심하여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석공소도 크산티페가 직접 운영했다. 그러나 이런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를 내쳤다는 기록은 없으며, 외려 소크라테스가 독배(毒杯)를 마시고 사망할 때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다혈질기가 있었고 잔소리에 자주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부부관계가 파탄날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었다. 아내의 잔소리에, 소크라테스는 이런 부인이 참을성을 길러준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하여튼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크산티페가 악처라고 전해지는 것은 다툼이 많은 친구를 악우라고 하는 것처럼, 단어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보이며, '효자보다 악처가 낫다'는 이야기와도 통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젊은이여, 결혼하라. 좋은 처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될 것이다"라는 농담도 그 행간(行間)을 읽을 필요가 있다.[* 어쨌든 행복하거나 똑똑해진다는 얘기니 결혼이 나쁘단 얘기는 안 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결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30대 후반에서 40대의 나이에 [[호플리테스|중보병]]으로 종군하기도 했다. 당대 아테네 시민은 신체 및 정신에 장애가 있거나 만 50세를 넘지 않았다면 군복무 의무가 있었으므로, 소크라테스도 군인으로 참여했다. 대표적인 참전 전투로는 [[델리온 전투]]가 있는데, 이때 아테네군이 패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침착하게 후퇴하는 담대함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소속된 부대도 소크라테스의 침착한 대처 덕분에 무질서하게 패주하지 않고 무사히 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아테네군의 운 좋은 일부 패잔병들끼리 뭉쳐, 소규모 집단이나마 전열을 다시 갖췄다. 추격하던 기병들은, 소규모이지만 저항할 태세를 갖춘 중보병 무리들을 회피하고, 지천에 널린 손쉬운 먹잇감인 비무장 도망병들에게로 말머리를 돌렸다.][* 실제로 전투에서는 패닉 상태에 빠져서 무질서하게 패주하면, 궤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패배하더라도 침착하게 전열을 어느 정도 갖춘 상태에서 후퇴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특히 [[팔랑크스|그리스식 보병 방진]]은 전열이 무너지거나 흐트러지면 답이 없지만, 뭉쳐있으면 상당히 강력해서, 퇴각 상황에서도 전열을 유지하고 있으면 추격하는 기병이라도 함부로 덤비기가 상당히 부담스럽다.] 무려 세 번이나 참전했다고.[* 포티다이아 전투(기원전 432년), [[델리온 전투]](기원전 424년), 암피폴리스 전투(기원전 422년)] 《아테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삶과 당시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소크라테스는 평생 동안, 위에 서술된 것처럼 세 번 참전했던 것과, 딱 한 번 이스트모스에서 포세이돈을 위해 열리는 대축제였던 이스트미아 제전을 구경하러 간 것을 합쳐, 단 네 번밖에 아테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크리톤》에서 아테네의 법이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형식으로 자문자답한 《소크라테스의 독백》에 의하면, '우리(아테네의 법)와 우리의 도시(아테네)만으로도' 소크라테스에겐 충분했기 때문이라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