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크라테스 (문단 편집) == 사망 == || [[파일:MorteDavidCgfajdavid30.jpg|width=600height=400]] || || [[자크 루이 다비드]]의 1787년 작품인 《소크라테스의 죽음》 || 죽기 직전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을 빚졌다며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으로서, 당시 아테네에서는 병에 걸렸다 나으면 이 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제물을 바치는 풍습이 있었는데, 자신이 독약을 마시고 죽음으로써 모든 질병에서 해방되니 고맙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서, 삶 자체가 질병이고 죽음은 그 '삶'이라는 병의 치료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으나, 소크라테스의 평소 언행은 그런 허무주의와 관계가 없었으므로, 진실일 가능성은 낮다[* 단, <파이돈>을 참고하면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원래 이데아계에 있다가 육체에 깃들게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위의 대화편에서, 자살을 종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 육체로부터 영혼을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피력한다. 허무주의의 의미라기 보다는 일종의 영혼불멸설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다른 각도의 해석으로는, 평소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쇠가죽만큼이나 두꺼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가죽'을 가렵게 하는 '등에(쇠파리)'에 빗대었듯이, '아테네인들의 무지의 병을, 나 대신 치유해 달라'는, 철학자로서의 임무를 완수해달라는 부탁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설(異說)들이 있다. 병으로 고생하다 나은 적이 있는데, 감사의 제물을 아직 올리지 않았기에 죽으면서 부탁을 남긴 것일 뿐이라거나, 또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이름의 이웃 사람에게 진짜로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었다거나, 심지어 그냥 농담이었다는 설까지 있다. 황당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대체로 할 말을 직설적으로 했지, 은유적으로 빙빙 돌려가면서 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굳이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고 의미를 해석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며 직설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플라톤의 책 《파이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독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파이돈》이라는 책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라는 사람에게 자기가 본 것을 이야기해주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제자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죽음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이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2가지를 들었다. 먼저 죽음은 잠과 같은 것이가 잠은 편하기 때문에 죽음도 편하다는게 첫번째 이유고, 죽어서 저승에 가면 그동안 죽었던 현자들과 공정한 지옥의 재판관들 사이에서 진정한 앎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죽는게 좋다는 게 두번째 이유다.] 죽음 이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독약을 먹고 누운 상태로 몸이 굳어지다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차분한 죽음의 모습은 플라톤이 포장한 것이라는 평가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플라톤은 이 시기의 소크라테스와 엮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 플라톤 본인은 당시 몸이 아팠다고 말한다. 다만 당시에도 그 이야기를 믿어준 사람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에 실제로 소크라테스가 죽을 시기에는 소크라테스 곁에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 당시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독약을 먹으면, 심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면서 전신의 마비와 경련과 함께 사망한다. 플라톤의 묘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먹은 [[사약|독약]]은 일명 [[독당근]](국명:나도독미나리)(Poison Hemlock, ''Conium Maculatum'')으로 알려진 것으로, [[알칼로이드]]계 독극물인 Coniine이다. 앞서 말한 구토 증세를 일으키는 독약은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는 독미나리이고, 소크라테스가 마신 독당근은 심장에서 가장 먼 부위부터 말초신경계를 공격해 마비시키는 독약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오히려 플라톤의 서술과 같은 품위 있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플라톤은 그 후 소크라테스를 죽인 민주제에 대해 분노에 휩싸인다. 스승을 죽인 민주제의 한계를 중우정치라 규정하고 그 대안으로 철인정치를 주창하기도 했다. 한 편 중요한 건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죽었냐가 아니라, '왜 그가 죽음을 선택했는가?'다. 소크라테스의 나이는 이때 이미 70세를 넘겼고, 남은 삶은 길어야 몇 년 되지 않을 나이였다. 일단 그는 재판장에서도 자기 신념을 꺾느니 죽겠다고 말한 데다가, 겉으로 공표한 것이야 어쨌든 속의 진짜 죄목은 매국노와 폭군의 정신적 스승으로 많은 아테네 시민들의 증오의 대상이었으니, 재판에서 타협의 여지는 없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이들을 대놓고 돕거나 한 게 아니라, 단지 정신적 스승일 뿐인데 사형은 너무하다는 평가가 아테네 내부에서도 꽤 많았으므로, 형벌을 벌금형 정도로 줄일 수가 있었는데, 스스로 그것을 내동댕이쳤다. 또한 감옥에서 탈옥할 수 있었는데도 이를 거부했다. 법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적용받고, 불리할 땐 피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던 논리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논리를 스스로도 실천한다는 일관성을 위해서 탈옥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소크라테스의 행동에 대한 설명으로, 처음부터 국가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시켰다는 설명이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및 이후 벌어진 피바람의 원인에 대한 청산 의도를 갖고 추진된 재판의 목적을 잘 알고 있었고, 제자들이 저지른 막장행위로 인해 벌어진 아테네의 혼란과 몰락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할 입장으로서 재판에 순응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황을 통한 추측일 뿐, 소크라테스는 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말조차 한 적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